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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타리/경제의 다양한 이야기

제8화 러시아, 강대국을 향한 긴 향해

by thanks tree 2023.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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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화 러시아, 강대국을 향한 긴 향해

 

 

  유라시아 북부의 광활한 대지, 세계 최대 국토를 보유한 나라 러시아 그들의 군주는 학생의 자세로 유럽강국들과 현대화의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기 위해 스승을 찾아다니기도 했고 전통적인 군주통치제도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등 넓게 퍼진 대국이 됐다.

 

  18세기초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황제 차르가 주도하는 개혁은 대국의 운명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그들은 재난 후에 강해지고 정상의 자리에서 좌절을 겪는다. 매년 10월부터 6개월에 길고 긴 겨울을 맞이한다. 

 

  1698년 10월 역모 주도 1000명 병사 처형 그들의 얼굴에는 죽음의 공포가 아닌 뜨거운 분노가 가득했다. 이를 집행한 이가 차르 표트르 1세이다.

  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원인은 표트르 1세다 서유럽 유학을 떠나 주변에 모든 것을 배우고자 탐구했던 인물이다.

 

  러시아의 강한 민족성은 한 사건과 연관성이 있다. 

  1472년 차르'군주'뜻과 라틴어, 카이사르의 러시아식 발음이다. 러시아의 그리스 정교회 한 장로는 차르에 대해 "인류에 역사는 상대 로마의 역사이다. 앞의 두 로마는 멸망했고 마지막으로 기독교를 신봉하는 왕국은 차르의 통치하에 합병될 것이다. 모스크바는 3번째 로마가 되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라는 양대 문명을 연결하는 교량으로 러시아의 민족의식 형태와 독특한 역할을 반영하고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시기에 국제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 해외무역과 약탈을 통해 큰 부를 축적하고 거대시장을 보유하고 있던 영국은 산업혁명을 준비 중이었고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17C중엽 유럽 대륙의 최강자로 발전해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경제는 농업에 의존, 전국에 몇 십 개의 수공업 공장, 상업은 대부분 외국인들 것이었다. 교육은 그리스 정교회 독점이었고 일반 국민들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수도 모스크바에서 글을 아는 인은 100명 중 3명뿐이었다. 이런 러시아와 서유럽의 차이는 표트르 1세의 유학 욕망을 자극했다.

 

  러시아를 강국의 지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선진 과학기술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감춘 채 대규모 사절단을 조직해 서유럽을 방문했다 이런 행동은 러시아의 민족적 우월감을 부셔놓았다. 유학도중 자국 내 반란으로 귀국 반란이 평정된 후 포트르1세는 사회 개혁 실시 러시아의 전통 역법을 없애고 유럽에서 통용되는 세력기원으로 대체, 서유럽 언어 방식에 맞추어서 러시아 문자 개혁, 러시아 인들에게 긴 수염 자르도록 수염을 남기면 중과세 부과했다.

 

  1700년 9월 유럽으로 통하는 문을 열기 위해 스웨덴과 전쟁 목적은 스웨덴이 점유하고 있던 발트해 출입구를 빼앗아 유럽과 직접 연결하기 위해서였다. 패전 후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군대 개혁 실시

 

  1712년 러시아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결정을 한다. 800여 년의 역사 지닌 모스크바 수도 포기하고 상트페트부르크로 수도이전 이 새 수도는 유럽식 복장을 입고 유럽의 언어를 말하는 이 도시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함께 살았다. 이것은 마치 러시아 역사를 새로 쓰는 것처럼 이전 러시아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고 러시아의 역사는 그저 백지장이며 그 위에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쓴 것 그 이전에 존재하던 러시아의 천년 역사를 새롭게 그려 나간 것 그것이 비극이었다.

 

  야만적인 방법을 통해 러시아 문명 발전을 추진했던 표트르 1세는 자신의 계획이 러시아인들에게 극한의 인내심을 요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에 힘을 남겨지만 러시아 제국의 정신적인 균형을 잃어버렸다. 그는 러시아를 위해서 유럽과 마주하는 창구를 열고 구습에 머물고 있던 국가를 개혁의 길로 이끌어지만 민족과 역사는 단절시켰다.

 

  전통과 현대와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것이 후발국가들이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위대한 전통을 보유한 국가들은 현대화의 과정 속에서 역사를 단절시켜서는 안 되며 자신들의 문화 자주권을 잃어서도 안된다.

 

  표트르대제가 죽은 후 러시아는 개혁 이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다 표트르 대제가 창시한 사업을 책임질 만한 용기와 능력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예카테리나 2세(1729~1796) 차르에 등극하자마자 표트르 후계자로 자청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우선 예카테리나의 자신의 인생경력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녀는 독일인 가정교사는 프랑스 사람, 당시 서방의 계몽사상 교육을 받음 즉 서방의 물건들이 러시아보다 선진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기에"우리 사회에 행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예감했다. 오직 정치적 포부만이 나를 고무시킨다. 마음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이 있으며 나를 여제로 바꿔놓았다.

 

  어떻게 러시아의 민심을 얻을 수 있었을까? 질문의 답은 그리스 정교회에 귀의, 러시아 언어습득, 독일에서 온 여제는 러시아의 전통 속으로 융화된다. 1775년 예카테리나 2세는 주요 도시마다 4년제 학교 세우고 또 각 지역의 도시마다 2년 학교를 세웠다.

 

  그 와중에 농도제도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인구를 토지에 속박할 수밖에 자유와 인권을 표방해 개혁을 추진하면서 전통과 현대에서 모순을 만나게 된다. 

 

  귀족도 사람이기에 그들 역시 자유를 원했기에 예카테리나는 그들에게 자유를 부여했는데 이것이 러시아가 자유를 향해가는 첫걸음이었다.

 

 

  차르의 전제통치하에 있던 러시아는 자신들의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다. 1856년 영국과 프랑스와 크림전쟁에서 패함으로 유럽의 정점에서 급격히 쇠락 이 해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철갑선과 대구경 대포사용 그러나 러시아는 목선

 

  이 전쟁에서의 중대장으로 참여한 톨스톨이 백작으로 작가, 사상가, 등장 비로써 1842년 농노제 폐지 이로써 러시아의 산업발전에 필요한 대규모 노동력과 방대한 시장을 제공된다. 톨스토이는 부활에서"모든 것이 하나씩 뒤집히고 모든 것은 또다시 시작됐다" 그는 러시아의 미래를 찾기 위해 유럽으로 이미 유럽은 산업화와 자본주의 제도로 부국강병의 길을 찾고 이었다. 

 

  또한 이런 쟁론의 과정에서 사상과 문화의 거장들을 배출한다. 그들의 사고는 단순한 전통과 현대 사회의 생존에서 빠져나와 스스로 세계를 관찰하고 사색하기 시작, 즉 자신들의 언어로써 전 세계의 관점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각종 사상의 선택과 실천 운동 속에서 20세기로 접어들고 1905년 러 일전쟁의 패배로 자산계급의 폭발한다 그 와중에 톨스토이는 모두 함께 모여 부유한 길, 농민 공동체의 길로 가야 한다는 각자의 사유재산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대 인물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정 위대한 민족은 세계의 무대에서 조연이나 주연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은 유일무이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2세기에 걸쳐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전제군주제도 자체를 건들 수 없었던 차르에게 개혁은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