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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타리/경제의 다양한 이야기

제4편 개혁의 고통 2부

by thanks tree 2023.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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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편 개혁의 고통 2부

 

당시 하버드를 방문 중이던 볼리비아 사람들은 만날 생각이 있느냐를 물어왔다. 당시 하버드는 볼리비아 사람들을 초청해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세미나를 열고 있었다. '당신에게 해결책이 있다면 볼리비아를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다 

 

 1985년 7월 내가 방문했을 때 볼리비아의 인플레이션은 6만 퍼센트에 달했다.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특별하고도 두려운 일이었다. 볼리비아는 낭떠러지에 서 있는 형국이었다.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 말했다

 

  삭스 교수가 만난 볼리비아 정치인들은 모두 공포에 떨고 있었다. 단 한 사람만이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거에서 승리 후 경제 교육부 장관이 됐다 그는 대통령에게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우린 앞으로 90일 후면 볼리비아가 역사상 가장 높은 인플레이션을 기록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좋소, 20일 안에 해결책을 마련하시오'라고 말했다.

 

  점진적 조치를 통해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막을 수 있느냐를 놓고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삭스는 점진적인 대책은 효과가 없다고 단언했다 의학에서도 때론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환자를 살릴 수 있듯이 문제가 심각할 땐 빨리 조치를 취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기회는 한 번 뿐이니 차근차근해나갑시다'라고 했더니 삭스가 말하더군요 '한꺼번에 해 치웁시다.'

 

  충격요법은 단순에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멈추고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1985년 8월 고니 대통령은 '충격요법'이란 이름으로 경제개혁안을 발표했다. 이후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남미를 중심으로 발전된 경제이론, 선진국에 종속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교역을 중단하고 국내산업 자립을 통해 경제 개발을 달성한다는 이론) 폐기됐다.   정부 지출은 삭감됐고 가격통제는 폐지됐다. 그리고 수입관세도 인하됐다. 마침내 정부 예산은 균형을 되찾았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복잡한 경제이론을 동원한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벌어들인 것만큼만 쓰겠다는 식의 아주 단순한 원칙을 지킨 것이다. 중앙은행에서 돈을 차입하지 않으니까 중앙은행도 돈을 인쇄할 필요가 없다. 충격요법을 도입하자 교통, 식품, 연료등 생필품의 가격이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칠레와 같은 군사 독재정권이 아닌 볼리비아의 정부가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정책을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볼리비아는 작은 나라이다. 하지만 중남미 여러 나라가 볼리비아의 개혁을 따라 했다는 점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다.

  

  브라질의 한 교수는 충격요법과 유사한 개혁 프로그램에 착수했는데 그는 과거 종속이론을 가르치던 사람이었다. 2만 퍼센트의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던 아르헨티나의 새 대통령은 말했다. '볼리비아 상황도 이렇지 않았나요?'

'시장 경제로의 개혁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 우리 아르헨티나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볼리비아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매우 흥미롭게도 볼리비아의 경제개혁은 지구 반대편의 동유럽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내가 참여했던 남미의 경제 개혁작업을 보고 한  폴란드 정부 관료가 찾아왔다. 그는 폴란드를 방문해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프리 삭스는 말했다.

 

 폴란드 바르샤바

 

폴란드 사람들은 기아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거리의 상점을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이곳에선 아이에게 먹일 우유를 구 할 수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레흐 바웬사는 '정치 체제는 하루 밤 사이에 바꿀 수 있지만 경제 체제를 바꾸는 데에는 몇 년이 필요하다.' 말했다. 

 

 동유럽에서 반 소련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소련은 항상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1953년 베를린, 1956년 부다페스트, 1968년 프라하에서 그랬다. 그러나 1989년 바르샤바에서는 달랐다. 폴란드 자유노조가 선거에서 100석 중 99석을 차지했다.

폴란드 공산당 서기장은 모스크바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 고르바초프의 대답은 아주 의외였다. '그냥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시오' 그 전화 한 통으로 냉전은 사실상 끝났다. 물론 실질적인 소비에트의 해체는 베를린 장벽 붕괴로 시작됐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 등이 차례로 공산주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1989년은 정말 놀라운 한 해였다. 폴란드는 자유를 찾았다. 폴란드 자유노조는 폴란드 경제를 자유롭게 할 임무가 남아있었다. 삭스 교수는 어떻게 하면 공산주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을지를 설명했다. 그는 '좋습니다 개혁안을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날밤 계획안을 만들어 다음날 아침에 전달했다. 그 문건은 자유노조 소속 의원들에게 배포됐다.

 

  큰 성취 후에는 잠시나마 아주 특별한 정치적 분위기가 조성된다. 사람들은 되찾은 자유에 흥분해 있었고 급진적인 정책도 받아들인 태세였다. 이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아주 빨리 움직여야 했다. 폴란드는 볼리비아를 본받아 충격요법을 도입하기로 했다. 

 

  가격은 거의 두배로 뛰어올랐지만 물자의 부족은 해결되지 않았다. 시장이 하루빨리 수요와 공급에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를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농부들이 수확한 작물들은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산책을 하던 중 상점의 가격표를 들여보았다. 달걀 가격말이다. 상점에 달걀이 등장해 가격이 떨어지면 시장이 작동하는 징후라는 것이다.

 

  드디어 달걀이 등장했다. 그리고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의 경제 안정 대책이 효과를 내고 있다는 신호였다. 국영 중공업 부문을 개혁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폴란드가 자유를 얻은 후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는 민영화였다. 과거 공산체제로부터 물려받은 오래된 산업들이 큰 문제였다. 실업문제, 비효율, 비 정상적 운영 등이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시장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수 만개의 중소기업들이 생겨났고 경제는 번창하기 시작했다. 소련 대사 직원은 고르바초프에게 분석결과를 보고 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실행을 망설였다. 이 개혁안은 책상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폐기됐다.

 

  미하일 고프바초프는 '폴란드의 개혁은 시험적 성격이 강했다. 거기서 개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의 개혁을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시장 경제를 빠르게 도입하던 중국이 보다 적절한 관찰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1989년 중국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해, 고르바초프는 북경을 방문했다. 그가 북경에 도착했을 때 천안문에는 반 정부 시위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중국에서도 공산당의 권력은 불완전해 보였다. 하지만 중국 경제는 등소평의 지도아래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등소평은 구식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마당을 거닐면서 무엇 때문에 공산주의 경제가 엉망이 됐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권력에 다시 복귀했을 때 자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말했다. 인민들에게 가난을 나눠줄 수 도 있고 부를 나누어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등소평은 동남아시아의 경제 발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런 성공에는 화교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모택동 사후 등소평이 중국을 개방한 것은 중국인들에게 행운이었다. 등소평은  이 과정에서 내부의 골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만 했다. 그들은 등소평이 사회주의를 해체하려는 게 아닐까 두려워했다. 등소평은 걱정하지 마라 자신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라 주장한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 이후 소련에서는 중국식 시장개혁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KGB는 정치적인 통제는 계속하되 덜 중요한 부분은 개방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권과 국유산업을 유지하면서도 경제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천안문 사태를 통해 중국 공산당은 정치적 통제를 포기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등소평은 구조개혁 후에야 개방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완전개방과 자유 투명성을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 기존체제를 유지하며 아무도 거역하지 못할 명령을 통해 서서히 구조를 바꾸는 거다.

 

  등소평은 아무 통제 없이 자유주의를 허용하면 체제가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결국 중국이 소련처럼 내부 분열하는 것을 막아냈다. 사람들은 ' 왜 고르바초프는 중국처럼 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한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4년 동안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성과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러시아는 인구의 80퍼센트가 도시에 살고 중공업위주의 경제를 가진 반면 중국은 인구의 80퍼센트가 시골에 살고 소농경제로 이루어져 있다. 소련 경제의 민영 부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의 본질은 핵심기간산업이었다. 그래서 중국처럼 점진적으로 개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모스크바 케네디센터 선임연구원 '고르바초프의 경제 개혁은 수렁에 빠졌다. 너무 늦게 개혁을 시작한 데다 너무 조심스러웠다. 결국 계획 경제체제의 바탕엔 손도 대지 못했다.' 1991년 8월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주주의 저항세력 대변인은 보리스 옐친이었다. 쿠데타는 진압됐다. 고르바초프는 간신이 쿠데타의 위기를 넘겼지만 그의 위신은 추락했다. 소련의 시대도 그와 함께 끝나가고 있었다.

 

  1991년 12월 말 고르바초프가 TV에 출연 그는 그 자리에서 소련이라는 국가는 며칠 내에 사라질 것이라고 선언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70년 만에 끝났다 암흑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보리스 옐친이 새 공화국에 대통령이 됐다. 그는 시장개혁의 전문가로 예고르 가이다르를 선택했다. 가이다르는 충격에 빠졌다 국고는 텅 비었고 겨울을 날 곡식조차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핵무기를 통제하고 있는지 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가이다르는 나중에 조정사가 없는 비행기에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설탕, 성냥, 소금을 구하기 위해 매일 줄을 서야 했다. 정말 위기 상황이었다. 경제상황은 재해 수준이었다. 인플레이션은 한 달에 20%에 달했다. 상점은 텅 비었고, 가격은 치솟았다. 당시 경제 책임자 가이다르의 나이는 35살 그는 젊은 개혁주의자로 팀을 꾸렸다 강경파 공산주의들은 그들을 '핑크 반바지를 입은 철부지들'이라 불렀다.

 

 러시아는 당시 36살이던 제프리 삭스를 초청해 경제계획에 대해 자문을 청했다. 당시 러시아의 의회는 공산당을 비롯해 반 개혁정당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가이다르는 처음부터 엄청난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의회는 그가 개혁에 착수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퇴진을 요구할 정도였다.

 

  가이다르와 그의 팀은 시대착오적인 공산당 체제가 자신들을 파멸시키기 전에 먼저 그것을 분쇄하기로 결심했다. 무기는 경제개혁이었다. 따라서 논의는 경제 재건이 아닌 군대, KGB 그리고 중앙통제경제 폐지에 집중됐다.

 

 러시아의 가격통제가 없어지기 하루 전 1991년 12월 31일 가이다르의 가격개혁은 다음날부터 전면적으로 시행될 예정이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그때까지 지켜왔던 모든 가치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가이다르의 다음 행보는 사격을 범죄행위로 규정했던 구 소련의 법률을 폐지하는 것이다. 그는 시장이 자유로워지면 물품부족 사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효과는 오래되지 않아 나타났다.

 

 출근을 위해 차를 타고 아동용품 가게 앞을 지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거기에는 거대 인파를 보았다. 수백 명이 한 손에 상업허용 포고문을 준채 물건을 매매하고 있었다. 공산체제가 75년이나 지속됐지만 기업정신은 잠재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 러시아에 물자부족은 없었다. 아무리 경제가 형편없는 상태라도 시장의 힘은 작용한다는 것을 느꼈다.

 

 개혁으로 시장은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개혁과 함께 물가상승이 시작됐다. 가이다르는 물가가 두 배 증가할 거라고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12배가 올랐다. 경제 개혁에 대한 모든 믿음도 사라졌다.

 

 인도 뉴델리

 

 소련의 붕괴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계획경제 모델 삼았던 인도의 이상도 산산이 부서졌다. 인모한 싱 인도 재무부 장관은' 명령에 의한 경제는 생각만큼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라고 말했다. 바깥세계와 무역을 단절한 채 관료 주도 인도 경제 성장은 멈추었다. 인도는 금을 담보로 엄청나게 차관을 들여왔다. 성장률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고 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싱이 재무부 장관에 취임했을 때 외환보유고는 10억 달러를 넘지 못했다. 그 돈으로는 간신히 2주분의 수입물량을 지불할 수 있을 정도였다. 총리는 자유시장의 개혁안을 승인했다. 당원들은 매우 당황했다. 우리가 추진하던 개혁에 저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인도 경제가 곧 무너진다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인도를 옥죄인 엄격한 허가제도는 사라졌고 국가의 통제도 줄어들었다. 정부의 기업보조금은 삭감됐고 관세등 무역장벽도 낮아졌다. 규제를 위한 각종제도도 철폐됐다. 우리는 국민들 특히 기업인들에 대한 정부의 속박을 줄였다. 인도인들에게 내재된 혁신정신을 끌어내기 위해 더 많은 경쟁제도를 도입했다. 인도 경제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더 큰 폭으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기록적인 숫자의 일자리를 만들어 냈고 인플레이션도 통제했다. 경제가 연 7%씩 성장하면서 비판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러시아 모스크바

 

 러시안 핵심 부분은 여전히 국가 소유로 남아 있었다. 매우 이상적이었던 젊은 개혁가들은 국유산업을 헐 값에 내다 팔아서라도 민주화시키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민영화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있었던 사람은 아나톨리 치바스 였다.

 

 70년간 지속되던 공산주의 독점이 사라지던 순간이었다. 국가는 시민들에게 새로 민영화된 기업을 살 수 있는 쿠폰을 지급했다. 보리스 옐친은 '러시아에는 소수의 백만장자가 아닌 수백만 명의 자산가가 필요합니다. 모든 시민, 노동자, 연금 생활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만 루블 상당의 민영화 쿠폰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민영화를 위한 구체적 계획이 전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1억 4천4백만 장의 쿠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어떻게 국영기업을 실제적으로 민영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계획이 없었다.

 

  만약 러시아 의회가 소집되기 전에 민영화 프로그램을 시행하지 않으면 의회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민영화 정책을 폐기시켜 버릴 상황이었다. 민영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장 경제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첫 번째  민영화 대상 기업을 모스크바 변두리에서 선택하기로 했다. 레닌이 말한 커맨딩하이츠와 거리가 먼 비스킷 공장이었다. 민영화 협조를 얻기 위해서 공장 간부들과 종업원들에게 주식의 50%를 주어야 했다.

 

 나머지 주식은 공개시장에서 민영화 쿠폰과 교환할 계획이었다. 의회 개원 하루 전 첫 번째 국영회사가 대중 공개 입찰에 부쳐졌다. 그때 의회에서는 강경 공산주의자들은 가이다르에 대한 신임 투표를 강행했다. 엘친은 가이다르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를 대신한 인물은 옛 소비에트체재의 중앙계획경제 영향을 깊게 받은 사람이었다.

 

 1992년 말 가이다르가 수상에서 쫓겨난 후 부패는 엄청나게 증가했다. 국유기업들은 매각됐고 쿠폰에 의한 주식거래도 걸음마를 띠기 시작했다. 시장 경제는 자리를 잡고 있었으나 그 출발은 불안했다. 모스크바에서는 투기가 난무했다 어떤 사람들은 모스크바를 미 개척시대 서부에 비유하곤 했다.

 

 많은 사회에 부패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엘리트층은 구소련시절의 도적불감증 속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재산을 모으는 방법은 도둑질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사유재산 제도가 시행되어 훔치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러시아에는 훔칠 것이 많았다. 석유, 가스, 니켈, 크롬, 다이아몬드 그리고 금 같은 엄청난 양의 국유 지하자원을 말이다

 

 규모와 큰 회사와 주요 산업들은 여전히 과거 소련시대 임명된 관리자들이 이른바 붉은 중역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은 막강했다. 그들의 모스크바 젊은 개혁자들과 민영화 정책에 완강히 반대했다. 러시아 경제의 커맨딩하이츠 즉 핵심산업 분야를 민영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붉은 중역들에 권한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었다.

 

 이는 진정한 경제의 지배자는 누구인지를 놓고 이들과 싸우는 것이었다. 누가 경제를 움직이는가? 시장인가 아니면 이들 간부인가? 노릴스크의 거대 공업단지는 붉은 중역들과 새로운 시장주의자들 간의 치열한 전쟁터가 됐다.

 

 블라디미트 포타닌 '인테포스' 회장은 러시아에서도 사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안 순간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소련의 형법에는 기업활동을 처벌한다는 특별조항도 있었다. 1995년 그는 노릴스크 니켈을 인수하기 위해서는 붉은 중역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흥 부자기업들과 손을 잡았다. 러시아인들은 그들을 '독점재벌'이라 부르며 혐오했다.

 

 1995년 즈음 러시아에 효율적이고 자질이 뛰어난 새로운 엘리트 사업가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들에게 자산이 없었다. 옛 공산당 중역과 자수성가한 새로운 사업가 사이에 벌어진 싸움은 그 때문이었다. 공산당 중역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적 지원이 필요했다. 

 

 한편 1996년 대통령 선거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날 것처럼 보였다. 1996년 초 옐친에 대한 지지도는 5%에 불과했다. 옐친에게 돈 많은 독점재벌들의 재정적인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옐친 정부와 독점재벌은 서로를  필요로 했다. 정부는 공산당의 복귀는 두려워했고 독점재벌은 재산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독점재벌은 정부의 주요 산업을 헐값에 인수할 수 있도록 비밀 협정을 맺었다. 독점 자본의 돈은 옐친의 선거에 쓰였다. 그들은 러시아 경제의 지배권을 원했다. 어떤 것이 더 투명하고 공개적인 민영화 방안인지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주택담보부 대출의 목적은 힘과 영향력이 있는 사업가 집단을 다수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사업가들은 공산당의 복귀는 막으려 할 테니까 독점재벌은 자신들이 소유한 부와 언론들을 이용해 옐친 재선을 지원했다. 여론 조사에서 앞서가고 결국 승리했다.

 

 독점 자본들은 크렘린에서도 자신들의 동지들을 확보했다. 포타닌은 결국 노릴스크 니켈을 인수했다. 전 세계의 니켈 1/3이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연간 매출액 25억 달러 그가 인수하기 위해 지출한 금액은 1억 7천만 달러에 불과했다. 주식 담보부 대출은 단순한 부정사건이 아니고 세계적인 도둑질이었다. 하지만 옐친은 공산주의 자들을 막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라면 지불한 용의가 있었다.

 

 볼셰비기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믿음으로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 결과 혁명을 재앙이 됐다.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생각을 내세울 때 이미 그 목적은 훼손되는 것이다. 옐친의 집권기간 동안에 러시아에는 정실 자본주의가 성행했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은 부패와 인플레이션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1998년 러시아는 외채에 지불불이행을 선언했고 주식시장은 붕괴됐다. 2000년 1월 1일 옐친이 갑자기 사퇴로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