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편 개혁의 고통 1부
러시아 노릴스크
한 때 많은 나라들이 소련을 경제 발전의 모델로 삼았다. 낙후됐던 이 나라는 레닌이 혁명을 통해 한 세대만에 산업화에 성공했다. 소련은 단호한 중앙계획경제를 통해 노릴스크 같은 거대한 산업단지를 조성했다.
노릴스크는 소련 경제의 역사가 집적된 곳이다. 초기의 정치범 수용소와 소련의 산업화 그리고 1990년대 경제붕괴가 벌어진 현장이다.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0만 명의 정치범이 이곳 광산과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한 예로 재판은 10분가량 진행됐는데 그곳에서 아내와 작별해야 했다.
정치범들을 동원한 강제노동은 소련 경제를 지탱하는 요소였다.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그들은 차렷 너희는 인민의 적이다. 한 발짝만 움직여도 경고 없이 쏜다'라고 말했다. 등이 오싹해졌다. 나는 속으로 '너희들이야 말로 인민의 적이다.'라고 생각했다.
소련의 중앙계획경제는 크렘린에서 경제의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목적은 소련은 강하고 자급자족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소련이 산업강국, 초 군사강국으로 부상하자 세계는 위협을 느꼈다. 공산주의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로 확산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가지만 해도 소련경제가 막강하다고 생각했다.
소련은 동유럽 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사회주의나 국가통제 그리고 국영화를 금과 옥의 진리처럼 만들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모델의 성공하면서 경제성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철의 장막
그러나 소비에트연방의 진실은 철의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소련은 지뢰밭, 탐조등, 감시탑에 의해 바깥세계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1980년 영국 정보부는 이 비밀의 벽을 뚫기 위해 러시아인, 이중간첩을 포섭했다. 그러나 소련 정부 KGB가 그들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는 철저히 감시당했다.
구출 계획은 워낙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어서 총리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영국 정보부는 소련의 경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전략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다. 당시 군축 문제가 워낙 주요했기 때문에 서방은 경제라는 근본을 소홀히 한 것이다.
고르디 에프스키(영국 이중첩자)는 소련은 전체 경제의 2/3 이상 군비로 소모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다고 보고 했다. 정보 분석가들은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나중에야 경제학자들은 소련이 국가 재정의 절반 이상을 군비에 지출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로써 서구 지도자들은 소련의 군사력은 막강하지만 경제는 매우 취약하다는 걸 알게 됐다.
소련 정부는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경제는 계속 나빠졌고 재정적자는 석유수출로 근근이 메워가고 있었다. 소련정부는 석유 수익을 내세워 경제 성적을 부풀렸고 세계는 속고 있었다. 지구의 궤도에는 소련의 위성이 돌고 있었고 바닷속에는 핵잠수함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70년간 소련의 공산주의가 지배한 소련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삶의 질은 서유럽에 한 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 있었다. "당시 소련 경제는 스탈린식 경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시장 경제도 아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엉망이었다." 아블린 스키 (러시아 경제학자)
야블린스키는 국영 광산 광부들의 낮은 생산성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소련 사람들은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죠. 일 할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 경제체제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해결책은 두 가지다 스탈린 시대처럼 총으로 노동자들을 위협하던지 아니면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겁니다.
당시 소련 노동자들을 가족을 위해 생활 수준을 높이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로 이 국가는 가난해졌고 사람들은 부패했습니다. 그리고 파산이 왔다 그렇게 위대한 제국이 몰락한 것이다.
인도 뉴델리
인도도 소련처럼 중앙계획경제로 부농 위주로 산업화하여 빈곤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전 세계 모든 국가주도 경제가 그랬듯이 인도 경제도 어려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영국인 상전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정부의 허가서를 상전처럼 모셔야만 했던 모든 일에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도에는 형식주의와 관료주의가 판을 쳤다. 사업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예로 1500달러짜리 컴퓨터 한 대의 수입허가서를 받는 데에만 1년에서 2년이 걸렸고 수도 델리에 50번 정도는 가야 했다. 법을 지키며 일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법을 우회하는 법을 선택했다. 즉 등록증과 허가서는 부정한 방법으로 얻을 수밖에 없었다.
'뇌물을 주고서요? 간단히 말하면 그렇지요.' 자급자족은 인도의 이상적 목표였다. 자국의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인도는 수입을 금지했다. 시장보호정책 탓에 가격만 높였지 상품과 서비스의 질은 형편없었다.
기업은 질식했고 경제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일종의 '결핍 경제'였다. 제 아버지는 차 한 대 사는데 15년 기다려야 했다. 세계로부터 격리돼 정부의 보호를 받는 통제 경제에는 어떤 동기 부여도 없다. 즉 생산성을 높이거나 새 아이디어를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 지도자들은 외부와의 교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쿠바의 후반케론, 그의 아내 애리타, 1960년대 쿠바 피델 카스트로 1970년대는 살바드로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천연자원은 풍부했지만 영원히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종속이론은 가난에서 탈출구를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무역장벽을 세워 수입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 종속이론의 주장이다. 자국 내 산업을 육성하지 않으면 세계 무역의 희생양이 된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산업 발전으로 자급자족을 할 수 있다는 종속이론은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외부에서 기술과 투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뒤처지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경쟁에 내몰리지 않는 기업은 나태하고 경쟁력이 없는 조직이 된다.
칠레 산티아고
1970년대에 오면서 라틴아메리카의 경제는 위기에 빠졌다. 칠레에서는 마르크스 주의자인 살바드로가 대통령에 선출 정부에 역할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칠레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결국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아덴테의 지지자들과 노조 지도자 좌파 행동들이 잡혀서 축구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수백 명이 살해당했다.
칠레의 군사정권은 이끌 것은 어쿠스트 피오체 장군이다 많은 칠레 중산층은 그를 구원자로 생각했다. 피노체트의 머릿속에는 군대 통솔 방안만 있었지 국가의 경제 운용계획 같은 것 없었다. 군사정부 집권 일 년이 지났지만 월 20%에 달하는 구조적 인플레이션은 계속됐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쿠데타 지도자 중 한 명이 피노체트와 면담을 가졌다.
나는 피노체트에게 '처음에 사람들은 당신을 칠레의 구원자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당신을 칠레를 파멸시킨 사람으로 기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피노체트는 '좋소 칠레경제를 살릴 계획을 48시간에 만들어 오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칠레의 위기를 타개책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시카고 보이즈뿐이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시카고학파의 사상을 배워서 돌아온 칠레의 경제학자들이다.
시카고학파는 정부의 역할은 최소화하고 자유 시장을 확대해야 시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매주 화요일에 모여 항상 무언가에 대해 논의했다. 어떻게 칠레 경제를 개혁하고 늪에서 건져낼 것인지에 대해서 그러나 군대식 사고의 특성 때문에 군사 정부의 장군들은 계획경제를 선호했다. '계획경제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거든요.'
그래서 밀턴 프리드먼을 초청했다. 그는 5일간 칠레에 머무르면서 칠레의 문제점들에 대해 강연했다. 주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시장이 자유로워지면 정치적 억압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프리드먼이 피노체트에게 말했다. '개의 꼬리를 여러 번 걸쳐 조금씩 자르면 개는 결국 죽게 됩니다. 인플레이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플레이션은 단숨에 잘라내고 경제는 살아낼 수 있습니다.'
칠레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고, 주요 개혁이 이루어진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500개의 국유기업들이 민영화됐고 정부 예산을 삭감했고 수입관세도 사라졌다. 시장은 자유로워졌다. 공산주의로 향하던 칠레는 자유 시장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큰 고통이 따랐다. 물가는 하늘 높이 올랐고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이들은 국민들이 받는 고통은 고려하지 않고 엄청난 규모의 경제 변혁을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실업률 30%까지 올라갔다.
시카고 보이즈는 개혁을 통한 이익이 고통을 상쇄하고 남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칠레 경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칠레 경제는 발전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군사정부가 물러나고 민주화 됐다는 것이다. 즉 자유시장이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칠레의 경제개혁은 그 당시 세계경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개혁의 필요성은 곳곳에서 힘을 얻고 있었다.
1980년대 소련
1980년대 이르자 소련 지식인들은 소비에트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러시아 기업은 '경제는 병을 앓고 있었고 교수들과 이에 대해 논의하고 싶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동료들과 함께 경제 세미나를 열었다. 참석자 중에는 한 명 가이다르는 프리드먼과 하이에크의 책을 잃었고 영감을 얻었다. 토론 내용은 혁명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허용범위를 훨씬 넘어선 것들이었다.
당시 정부에는 팬티스타킹을 다루는 위원회고 있었다. 치약과 가루세제 같은 기본 생활품도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오래전부터 필요로 했던 젊고 열정적인 개혁 지도자였다. 소련체제는 그 이전 15년 동안 고유가에 의해 지탱 돼왔다. 그런데 그가 취임하자 유가 폭락으로 소련의 경제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로 불린 경제구조 개혁에 들어갔다. 중앙계획경제의 규제를 많이 철폐하긴 했지만 제도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서방의 대처와 레이건은 공산주의에 대해 공세를 펼치려는 결의에 차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한 이후 대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앙계획경제의 사악함과 비효율성에 대해 고르바초프와 토론을 벌였다.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은 철의 장막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인 베를린에서 소련을 향해 공격적인 연설을 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만약 당신이 자유화를 원하다면 이곳 베를린으로 오시오. 고르바초프 서기장, 이곳의 문을 활짝 여시오. 그리고 이 장벽을 무너뜨리시오.'
폴란드 바르샤바
대처 총리는 폴란드에 자유시장 메시지를 전했다. 방문 전 1986년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들은 공산주의 통치에 저항한 경험이 있었다. 경제위기로 인한 물가 상승과 식료품 부족한 상태가 벌어지자 분노한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던 것이다. 파업 지도자는 바웬사라는 전기 기술자였다 서방 세계가 차관제공을 거부하면서 폴란드는 빚더미에 올랐다. 천만명의 노동자들이 자유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바웬사의 지도하에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이 됐다.
그러나 1년 동안 파업에 계속되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 바웬사는 자택연금에 취해졌다. 1988년 폴란드에 대처 방문 대처가 바웬사와 동지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대처는 아주 강한 사람이었고 그단스크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대처는 노조 지도자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얻어야 개인의 자유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노조가 확실한 생각과 계획을 갖고 있어야지 인기만으로는 안된다고 했다. 대처가 바웬사에게 폴란드 정부에 자신의 의사를 어떻게 전달하는지 물었다. 바웬사는 웃으며 천장을 가리켰다. '어럽지 않죠. 정부는 이 만남을 도청하고 있으니까요.'
볼리비아
라틴아메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189번이나 군사 쿠데타와 역사를 가진 정치적으로 내부 불안전한 나라였다. 당시 볼리비아의 인플레이션율은 인류 역사상 7번째로 높은 것이었다. 인플레이션은 23500 퍼센트에 달했고 물가는 매시간 올랐다. 볼리비아 사람 열 중 일곱은 가난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 더 심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그들의 주머니는 늘 비어있었다. 문제의 근원은 정부의 재정지출이었다.
세금 수입의 30배 지출 수십억 달러가 있었지만 빌려줄 곳이 없었던 국제은행들이 라틴 아메리카에 주목했다. 국가는 결코 파산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은행들이 엄청난 금액을 빌려주었다. 사실이긴 하지만 국가도 때로는 돈을 갚지 않는다.
1982년 멕시코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볼리비아의 경우 수십 년간 그들은 세금을 걷지 못했다.
그러나 돈이 필요하니 화폐를 찍어냈다. 세계은행은 사무실을 폐쇄했고 IMF는 직원을 철수시켰다.
'다큐멘타리 > 경제의 다양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편 새로운 게임의 규칙 1부 (0) | 2023.12.09 |
---|---|
제4편 개혁의 고통 2부 (0) | 2023.12.06 |
제2편 경제 이념전쟁 2부 (0) | 2023.12.04 |
제1편 경제 이념전쟁 (0) | 2023.12.01 |
제12화 21세기 대국의 길 (0) | 2023.1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