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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타리/경제의 다양한 이야기

제5편 새로운 게임의 규칙 1부

by thanks tree 2023.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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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편 새로운 게임의 규칙 1부

 

1990년대 많은 나라에서 진행된 자본주의 혁명으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제무역이 가능해왔다. 새로운 세계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국제무역이 가능해졌다. 새로운 세계화의 충격에 대한 논쟁도 벌어졌다.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세계 경제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누가 글로벌 경제시대에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싸움은 이제 시작되고 있다.

 

  9.11의 슬픔 속에서도 나는 희망을 봅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강화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시장을 개방한 나라들은 미국이라는 교역 상대 투자자 그리고 친구를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혁명을 경험하고 있다. 1990년대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경제의 탄생을 목격했다.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그 누구도 통제권은 갖지 못한 단일시장이 생겨난 것이다. 세계화는 전례 없이 풍요를 가져왔다. 그와 함께 사람들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위기와 위험도 생겨났다.

 

  세계화가 시작되면서 부와 빈곤, 이 시대의 새로운 게임의 규칙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역사학자들은 냉전이 끝나고 걸프전쟁이 일어났던 1990년대 초 새로운 세계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멕시코가 채무불이행을 선언 직전이었기 때문에 회의는 매우 긴장됐다. 대통령 자문단은 멕시코에 50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라고 권고했다. 즉'위험성도 크고 국민들도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구제금융 정책은 성공했다. 멕시코는 재빨리 채무를 상환했다. 그러나 멕시코에 대한 계획은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대형 투자자들 까지도 보호해 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구제받은 사람들은 멕시코 국채를 소유한 외국인들이었습니다. 멕시코의 위기로 금융시장에 새로운 얼굴이 드러났다. 기술에 발달로 자본이 말 그대로 몇 주 안에 국경을 넘나들수 있었던 것이다.

 

 지구촌 (The Global Village)

 

1990년대에는 자본도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새로운 상업과 사상들이 그 뒤를 따랐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이메일에 대해 알거나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도 안돼 이 메일은 전 세계에서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이 메일 덕분에 전화요금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전 세계 통화량은 수직상승했다.

 

 

 

 

 커맨딩 하이츠 저자 다니엘 여진은 세계는 투자, 무역, 문화, 생각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하나로 연결됐다. 종종 그렇듯이 이번에도 변화는 빨리 진행됐다. 사람들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알려면 최근의 과거를 이해해야만 했다.

 

 세계화 이념

 

 세계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은 자유롭고 개방된 시장에 대한 믿음이었다. 자유무역은 200백 년 이상 자유주의 사상에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 글로벌 시장에서 자유무역은 단순한 사상을 넘어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이 얘기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실의 경제 속에서 미국만은 표류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1992년에 시작된다. 당시 미국에서는 불황으로 천만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미국 기업들은 외국기업들의 경쟁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유럽은 하나의 무역공동체로 통합됐고 일본은 무적인 것처럼 보였다. 일본 회사들은 록펠러 센터와 유니버설 스튜디오 같은 미국의 상징들을 사들이고 있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아칸소의 주지사였던 빌 클링턴은 자신이 미국을 제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경쟁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독일은 어떻게 하고 일본은 어떻게 하는지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 금융가를 만난 자리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미국에 금융계는 정부 재정지출과 적자를 줄이고 자유무역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이러한 정책들이 실현되지 않으면 미국 경제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로버트 루빈 당시 골드만 삭스 회장 ' 10여 명 정도가 조촐한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습니다. 나는 국가 회계를 바로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당시 미국 정부의 빚은 4조 달러에 달했다. 클린턴은 무역 자유화를 지지했는데 자유무역은 1990년 대선의 이슈였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 사이에 무역과 투자에 제한을 없애는 새로운 협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자유무역 지지자들은 개방된 시장을 통해 부를 창조하고 세계를 하나로 묶으며 더 번영되고 안전한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프타로 세계화를 정치적 시험대를 올린 첫 사건이었다. 미국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클린턴의 경제정책은 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는 첫 번째 임기 내내 재정적자를 줄이는데 혼신을 다하는데 기울였다. 그러나 무역에 관한 입장은 바뀌었다. 클린턴은 부시가 지지하던 나프타를 적극지지한다고 바뀌었다. 그는 글로벌경제시대의 빠른 변화라는 맥락 속에서  NAFTA에 대해 이야기했다. 무역뿐만 아니라 기술발전 시장경제의 확산이라는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즉 NAFTA의 체결여부는 변화를 받아들여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낼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경제구조에 매달려 변화를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눈 깜짝할 사이에 자본이 이동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베를린 장벽과 동유럽 국가들의 분리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 완전한 통제 사회조차도 경제와 기술,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이 가져오는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부 지지자들은 NAFTA의 클린턴의 입장변화를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노동운동계는 NAFTA가 대기업을 위한 무역 투장협정이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다. 이 협정으로 다국적 기업의 유연성, 이동성 영향력이 증대됐다. 반면 NAFTA는 노동자들의 조합설립과 단체교섭권을 보호하지 않았고 다국적 기업에 맞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멕시코 티후아나

 하원 민주당 의원 중 60%가 나프타에 반대투표 공화당의 지지가 없다면 통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NAFTA가 의회의 비준을 얻자 수천 개의 외국기업들이 멕시코 북부에 공장을 지어 몇 마일 떨어진 미국에 상품을 수출했다. 멕시코 인구 40%는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 멕시코가 NAFTA와 자유무역을 받아들인 것은 당시 개발도상국들이 자유무역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많은 개발도상국가들이 개방된 시장이야말로 경제성장의 열쇠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빈센트 폭스 전 멕시코 대통령 '나는 언제나 세계화를 기회라고 생각했다. 미국과의 무역협정만으로도 400억 달러에 불과하던 우리의 전체 무역량이 크게 늘었다. 6년 만에 2.800억 달러가 됐다.' 분명히 무역과 투자는 증가했다. 무역 규모만 놓고 보면 NAFTA는 매우 성공적이다. 하지만 보통의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 무역량은 중요하지 않다.

 

 기업들은 더 공격적으로 멕시코로 공장을 옮기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임금을 낮추고 노조를 억압한다 NAFTA로 인해 미국에서 다국적 기업의 힘이 훨씬 커졌다.

 

 미국 정부에 따르면 NAFTA 발효 이후 멕시코와 캐나다 상품의 수입으로 약 40만 개의 미국 내 일자리가 피해를 입었다. 반면 두 나라에 수출로 9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됐다. 1990년대를 거치며 국제무역은 거의 두 배나 증가했다.

 

 글로벌 시장( THE GLOBAL MARKET)

 

 사람들은 무역이란 보통 상품이랑 재화가 국경을 넘어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장 큰 규모의 무역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돈이다. 주식, 채권 그리고 화폐가 끊임없이 24시간 전 세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실질적인 글로벌 금융시장에 투자자가 됐다. 상품무역규모:8조 달러, 자본이동규모 : 1500조 달러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캘리포니아주는 미국에서 가장 큰 연금펀드 하나를 운영한다. 캘퍼스라는 이 펀드는 100만 명이 넘는 연금기금을 관리한다. (캘퍼스 캘리포니아 공무원 퇴직연금 기금자산;1500억 달러) 캘퍼스는 수십 년 동안 미국 내에서만 투자했다.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투자의 대상이 변했다. 자산의 1/4이 외국에 투자되는 것이다 풍부한 자금을 가진 연금펀드는 세계 경제의 활력소가 됐다.

 

 윌리엄 데일 크리스트 전 캘퍼스 회장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더욱더 더 작아지고 있고 글로벌 경제는 성장하고 있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오늘날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자금제공자, 특히 대형 연금펀드들이다. 미국인들이 연금기금에 투자한 금액은 11.5조 달러에 달했다.

 

 냉전이 끝난 후 많은 나라들이 자신들의 자본시장을 처음으로 외국투자자들에게 개방했다. 캘퍼스들과 같은 펀드들은 새로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펀드 매니저들을 고용해 제3세계 신흥 시장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겼다.

 

 마크 모비어스 템플틴 펀드 회장은 한 달에 15개국 여행 60억 달러 자금관리 우리가 신흥국가들에 주목하는 것은 이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들의 성장에 편승에 투자자들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이다. 물론 위험부담이 크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우리의 일은 위험을 최소화하고 수익은 최대화하는 것이다. 항상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지만 우리의 목표는 그것이다.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클린턴 정부는 자유무역협정을 확대해 나갔다. 미국은 개발도상국들에게 더 많은 개방을 요구했다. 외국에 장기 투자가 필요한 개발도상국들이 많은 나라들이 과거 서양의 식민지였다. 이들 나라들은 규제 없는 자본이 자신들의 독립을 위협하는 새로운 요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하티르 빈 전 말레시아 총리는 공산주의가 패배하자 자본주의가 팽창했고 그 실체를 드러냈다. 계획경제 대신 이른바 자유시장을 선택하라고 권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어디서든 원하는 대로 행동하려는 자본을 제어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1990년대 더 많은 나라들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불렀다. 시장 개방은 일종의 혁명이다. 그것은 매우 영향력이 큰 혁명이다. 결국 시장 개방을 통해 모든 사람이 경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1994년 1월 멕시코

 

 NAFTA가 발효되던 그날 좌파티스트 반군이 멕시코의 남부에서 봉기했다. 얼마뒤 유력 대통령 후보가 암살됐다. 정세에 불안을 느낀 외국 투자자들이 멕시코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경제가 새로운 종류의 위기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1994년 12월 미국 워싱턴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은 '재무부 장관이 전화를 해왔어요, 장관은 그린스펀과 네게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멕시코 페소가 폭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멕시코 페소가 폭락하면 멕시코는 매우 불안정해질 것이고 5백만에서 9백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앞으로는 매우 일반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멕시코가 채무불이행을 선언 직전이었기에 때문에 회의는 매우 긴장됐다. 대통령 자문단은 멕시코에 50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라고 권고했다. 즉 '위험성도 크고 국민들도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구제금융정책은 성고 했다. 멕시코는 재빨리 채무를 상환했다. 그러나 멕시코에 대한 우험한 선례를 남겼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체험을 감수해야 하는 대형 투자자들까지 보호해 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구제받은 사람들은 멕시코 국채를 소유한 외국인들이었다. 멕시코의 위기로 금융시장에 새로운 얼굴이 드러났다. 기술에 발달로 자본이 말 그대로 몇 주 안에 국경을 넘나들수 있었던 것이다. 

 

 지구촌(THE GLOBLA VILLAGE)

 

 1990년대에는 자본도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새로운 상업과 사상들이 그 뒤를 따랐다.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이 메일에 대해 알거나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로부터 10년도 안돼 이 메일은 전 세계에서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이 메일  덕분에 전화 요금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전 세계 통화량은 수직상승 했다.

 

 사람들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 잔액조회를 조회하기 위해 신용회사에 전화한 고객이 인도에 위치한 콜센터에 연결된다. 이곳 상담원들은 미국식 이름으로 고객을 만난다.  인도에 한 외딴 마을 과거에는 경작한 곡물을 시장에 판매했다. 하지만 인터넷 덕분에 곡물을 세계시장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된다. 그 가격 8천 마일이나 떨어진 시카고 상업거래소에서 결정된 가격이다.

 

이런 국경 없는 사회는 새로운 종류의 사업가를 만들어 냈다. 기업가는 이제 다국적기업과 같이 사고하면서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생각한다. 나라야 하무터는 가장 먼저 인터넷 혁명을 이해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과거에는 우리 모두가 계획경제와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지금과 다른  시대에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부를 재분배해서는 빈곤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부를 창출해야 한다. 

 

캘리포니아주 실리콘 밸리

 

인력에 이동도 점점 더 쉬워지고 있다. 미국은 이민법 완화에 엄청난 하이테크 인원을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끌어들였다. 20만 명의 인도인들이 실리콘 밸리에서 직업을 구했다 이곳은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 실리콘 밸리는 새로운 기술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업가 정신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벤처캐피털 DFJ 회장 팀트레이더는 우리는 인터넷이 세상을 바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인터넷을 통해 상업과 통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과거 인도와 아프리카 파키스탄 중국은 모두 고립돼 있었다. 세계경제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다른 곳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기회였고 우리는 그 기회에 올라탄 것이다.

 

 세계인구 1/4이 역사상 처음으로 글로벌 시장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농촌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업화로 도시로 몰려가 글로벌 시장을 겨낭해 만들어진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다.

 

 세계화시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인구 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세계경제 성장의 80%로 도시를 중심으로 펼쳐질 것으로 예측된다. 린 생산 공장 노동자는 예전에는 시골의 학교 교사였다 한 달에 경우 100위안을 벌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 달에 3000위안을 번다. 아이는 공장 근처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제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 

 

 싱가포르

 

 중국 지도자들의 경제모델은 동남아시아였다. 이들은 무역과 투자로 인해 짧은 시간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륙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1819년 영국이 점령했을 때 이곳은 120명 정도가 사는 어촌이었다. 땅이 척박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대영제국이 무어졌을 때 모두가 독자적으로 무역을 하려 했다. 그래서 우리는 싱가포르를 세계가 찾는 곳으로 만들어야 했다.

 

 개방한 나라들은 더 부유해지고 고립을 택한 나라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1970년 이후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세계를 상대로 한 수출국가가 됐다. 우리는 그것을 아시아의 경제 기적이라고 부른다. 1990년대 중반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년 10%의 놀라운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는 아시아의 시대라는 확신과 희망이 있었다.  아시아에 투자하기만 하면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는 수익이 생길 것이라 생각했다.

 

  일본 도쿄

 

카오리 마루야 일본 정치인은 당시 일본은 버블경제의 한가운데 있었고 사람들은 부채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거품이 꺼지고 난 뒤에야  사람들은 꿈에 깨어 현실로 돌아왔다. 일본은행들은 1조 달러 규모의 불량채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 때 일본의 경제 성장은 계속될 것 만 같았다. 하지만 일본은 세계화에 대한 움직임에 기민하게 적응하지 못했다.

 

 에에 수게 사카키 마라 전 일본 재정부 차관은 일본은 매우 폐쇄적인 사회다 거리에서 외국인들을 거의 볼 수 없다. 일본은 경제 문제는 이런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의 경제의 한쪽에는 도요타와 소니 같은 경쟁력 있는 수출 산업이 자리 잡고 있다.

 

 다른 한쪽에는 내수용 산업이 있는데 경쟁력이 매우 떨어진다. 일본에는 시장주의 경제와 사회주의적 평등 지향적 경제가 공존하는 셈이다 일본 경제는 오랫동안 정부관료들에 의해 극도로 규제됐다. 나이토 마사하사 전 일본 통상산업부 장관 나는 일본의 금융규제를 풀려했었다. 1990년의 글로벌 시장은 새로운 현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전부 나의 동료들은 나를 비판했다. 그 후 예고 없이 해고당했다.

 

 태국 방콕

 

아시아의 경제기적이 처음으로 문제에 직면한 것이었다. 1997년 초 급속히 성장하던 동남아시아의 경제는  과열되고 있었다. 1990년 태국은 자국의 자본시장을 개방했다. 외국기업들의 은행으로부터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아난드 파나라촌 전 태국총리는 유럽과 일본 은행관계자들이 찾아와 자기들의 돈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거의 사정하다시피 했다. 금융 시스템에는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제도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것은 은행시스템과 증권법안들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금융경제가 글로벌 경제에 통합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태국의 중앙은행은 그들의 통화가치를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했다. 그것은 투기 버블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금융위기 국가들의 최후의 의지 수단인 IMF 즉 국제통화기금은 태국의 붕괴위기로 가고 있다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스탠리 피셔 전 IMF 수석 부총재는 1997년 5월 방콕에 갔을 때  시내 모든 곳이 건설 중이었다. 건설 붐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은행들은 건설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었는데 문제는 입주자가 없었다. 태국 통화 바트는 달러와 연동되어 있었다. 태국 경제가 악화되면서 국제금융시장은 달러의 연동정책이 지속될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태국은 자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했다 고정환율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태국의 달러 보유고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하면 언제나 바트화를 달러로 교환할 수 있는지 걱정한 거다.

 

 결국 사람들은 달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자국 통화 보호를 위해 달러는 마구 풀면서 태국의 외환 보유고는 계속감소했다. 결국 태국이 곤경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한 해지펀드들이 바트를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1997년 7월 태국 정부는 바트를 평가절하할 수밖에 없었다. 거품은 더 커졌다. 아시아의 금융위기가 막 시작된 것이다. 모든 물가가 다 올랐다. 수도 전기 비누까지도 하지만 봉급은 그대로이거나 심지어 줄기도 했다. 경제가 사실상 붕괴상황에 이르자  IMF로 긴급구제차관을 받았다. 그것이 효과가 없자 위싱턴에 도움을 청했다. 누구도 태국의 작은 경제가 세계경제의 위기를 가려오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상황을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금융전문가들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돈은 아시아 전역에서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이것을 금융전염병이라 불렀다. 1160억 달러의 돈이 동남아시아에서 빠져나갔다. 위기는 거칠 때마다 새로운 위험이 드러났고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금융 전염병이 되었다.

 

  서로 다른 경제들이 연결된 세계화의 실체가 드러났다. 위기의 단계마다 새로운 충격파가 만들어져 다음 단계로 몰아친 것이다.

 

1997년 7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전염병은  이웃 국가들로 번졌다. 말레이시아 통화 가치는 끊임없이 추락했고 주식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펀드 매니저들은 아시아 국가들 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시아에서 빠져나가려만 했다.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고 기업들은 무너졌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사회가 무너졌다. IMF는 인도네시아와 다른 아시아들의 국가들에게 제공할 막대한 차관을 제공했다. 조건은 이들 나라들이 정부 지출은 줄이고 금리를 높여며 부패는 척결하는 것이었다.

 

 아시아의 일부 지도자들은 IMF가 신식민지 조건을 내세웠다고 생각했다. 통화를 흔들어 아세안의 경제를 훼손하려는 치밀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 과거에는 군사력으로 어떤 나라를 정복하고 통치했다. 

 

 오늘날에는 한나라를 불안정하고 가난하게 만들어 자기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움을 제공한 대가로 그 나라의 정책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정책을 통제한다는 것은 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다.

  

 1997년 말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 중 하나인 한국에서도 전염병에 감염됐다. 금융위기가 단 6~7개월 만에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는 것은 믿기 힘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세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글로벌화되어 있었다.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은 세계 경제 11위 한국의 당시 외환보유액은 40억 달러 정도였다. 당시 한국은 하루에 11억억 달러씩 쓰고 있었다. 한국이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1997년 12월 서울

 

한국이 IMF에 도움을 요청하기 며칠 전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은행은 방문해 외환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살펴보았다. 은행은 텅 비어있었다 한국은 일본과 유럽은행에서 빌린 대외부채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기 직전이었다. 일본과 유럽은행들은 자기 정부의 압력에 따라 한국에 대출 만기 연장에 동의했다. 한국은 550억 달러 규모의 차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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