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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타리/경제의 다양한 이야기

제2편 경제 이념전쟁 2부

by thanks tree 2023.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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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경제 이념전쟁 2부

 

1947년 인도 뉴델리

 

인도 독립의 아버지는 마하트마 간디였다. 그의 경제적 이상은 자급자족의  경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파 네루는 인도를 산업화하고 정치는 의회 민주주의 경제는 소련 계획경제를 도입하기를 원했다.

 

 정부가 국가의 기간산업 중 커맨딩 하이츠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철강, 석탄 등 중공업이 공공 부문에 속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네루는 합리성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그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극심한 빈곤을 해결하려고 했다. 네루 치하에서 중앙계획경제는 일종의 과학이었다. 마할라노비스라는 천재 통계학자도 그중 하나였다. 네루는 마할라노비스에게 인도의 경제계획을 세워보라고 지시 그는 인도 경제 전체를 하나의 수학공식으로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이 완벽한 수학공식이 현실세계에서도 적용될 것이라고 믿었다. 인도는 신흥 독립국가들의 경제성장 모델이 됐다. 인도는 신흥 독립국가들의 경제 성장 모델이 됐다. 개발 도상국들은 사회주의와 계획경제 정부의 통제와 규제, 소유를 복음처럼 받아들였다. 아프리카 전역에서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그들을 가난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남아메리카 정부들은 국가의 통제 아래 현대화를 이루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소련이나 중국 같은 공산권 국가들이 약진하면서 사회주의가 경제발전에 길을 제시하는 듯했다.

 

  1950년  미국 시카고

 

1950년 하이에크의 시장경제이론은 주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교수하기를 원했지만 그를 채택하겠다는 대학은 한 군데뿐이었다. 

 

  시카고은 언제나 주류와는 거리를 두는 특별한 도시다 훗날 시카고 대학의 지적 영향력은 매우 커졌다. 이곳 출신 교수 8명과 경제학자 11명이 연이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시카고학파는 경제를 제대로 통제하려면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자유시장을 확대해야 한다는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한편에서 케인주의자들은 프리드먼은 개인주의, 자유, 그리고 시장만을 강조하고 평등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인 시카고학파들을 몹시 싫어했다. UCLA 알 하버거 경제학 교수는 '시장은 그 자체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이나 조수와 같은 것입니다. 이 힘을 무시하면 위험이 따릅니다 시장의 힘을 이용해 사회적으로 이익이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경제학에서 케인즈의 영향력은 굉장했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가 악화되는 이유는 정부가 제 역할을 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중앙 계획경제와 비슷하지 않나요?

 

  미국 내 케인즈 주의자들은 경제란 스스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같은 전문관료들이 조율해야 하는 정교한 기계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케네디의 예일대 연설에서 "오늘날 우리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치열한 이념 전쟁이 아니다 경제를 어떻게 잘 운영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1960년대 의 호황

 

  영광의 30년이라고 불렸던 만큼 케인스주의는 기대에 부응했다. 유럽과 일본 그리고 미국 모두 고도 경제발전 성장과 생활 수준의 향상을 이루었다.

 

 1970년 오스트리아 

 

하이에크는 낙심해서 고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혼합경제의 성공으로 인해 하이에크 자신과 그에 자유시장이론은 그 어느 때보다 시대에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서서히 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무렵 신문기사에 스테그플레이션(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을 합성, 경기 불황과 인플레이션의 공존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기사였다.

 

 1971년 미국

 

경제는 방향을 잃었고 인플레이션도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경제가 병에 걸린 거 같았다. 이는 스테그플레이션이 생겨나면서 케인스주의는 종말을 고했다. 케인주주의 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두 가지 현상이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즉 경기침체로 실업률이 높아진 데다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찾아온 것이다.

 

  닉슨의 재집권 이후 경제 상황은 더 악화됐다. 사람들은 물가는 감당할 수 없었다. 농장주들은 가축을 시장에 내놓지 않았고 농부들은 닭을 익사시켰다. 인플레이션을 잡기는커녕 생필품 부족 현상이 벌어졌다.

 

 1973년 영국 런던

 

영국식 혼합경제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했다. 경제회의에서 배관공이 수리비를 얼마나 청구해야 할지 택시 기사는 요금을 얼마나 받아야 할지 미용사는 월급을 얼마나 받아야 할지를 사실상 결정했다. 결국 가격통제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광부들의 파업과 석유파동은 영국을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1957년 경제문제연구소 설립. 하이에크가 만든 몽페를랑 모임, 책 [예종의 길] 그리고 자유 경제에 대한 그의 신념이 모두 이 연구소에 담겨있다. 조셉도 이 연구소에 합류했다.  조셉은 영국 경제를 살리려면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파산하고 빈부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전에 누구도 평등이라는 사회적 합의에 도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키스 조셉은 "당시 영국에서는 적당한 인플레이션이 완전 고용과 성장 그리고 사회보장을 이루는 방법이라 여겼다. 그 결과 영국은 공산주의 국가들을 제외하고 어떤 산업국보다 더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키스 조셉이 대처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직관은 다듬어지지 않은 이성 말처럼 키스는 대처의 직관을 지적으로 강화시켜 주었다. 그녀는 옥스퍼드 대학 시절 예종의 길을 읽었다. 1974년 하이에크는 세상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학문적 견해와 세상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1974년 스웨덴 스톡홀름

 

1974년 하이에크의 노벨상 수상 이미 대세는 케인스에서 하이에크로 기울고 있었다. 

 

1974년 미국 시카고

 

  미국 경기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산업은 부진했고, 실업은 증가했다. 4차 중동전쟁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자 아랍은 석유 수출을 중단, 석유값 물가는 상승 지속했다.

 

  항공 수공업 그리고 철도산업을 규제해서 도대체 어떤 효과를 거두었다는 말입니까? 심펠츠만 시카고대 교수

 대부분의 경우 가격만 올랐을 뿐입니다. 규제는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억누릅니다.

 

  1974년 미국 워싱턴 DC

 

 항공산업계는 덕분에 주요 항공사들은 신생 항공사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민간 항공위원회가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각종 규제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 후 민간 항공위원회 폐지 "경쟁이 게임의 규칙입니다. 경쟁 덕분에 소비자들은 이전보다 더 나은 서비스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탈 규제로 민간 항공사들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항공업 규제 철폐 후 20년 지나 지금 항공업 종사자는 2배로 늘었고 승객수는 3배나 늘었다. 이는 자유경쟁이 시작되자 슈퍼 세이버 요금, 슈퍼 에이펙스 요금등 각종 할인요금이 생겨났다. 폭발적인 할인, 폭발적인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극적이었다.

 

 1979년 영국

 

  5% 임금인상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파업은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이죠?

 그 해 영국은 불만족스러운 겨울이라 불리었다. 매번 그랬듯이 이 번 파업도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노조가 벌이는 더러운 짓이다. 청소부와 구급차도 파업에 참여했다. 심지어 공동묘지 인부도 파업 중이었다.

 

 대처 총리 당선 일부 국민들이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그녀는 결연한 자세로 영국 경제를 개혁해 나갔다. 마게렛 대처는"사회주의와 과도한 세금, 규제 그리고 공공지출로 기업의 사기는 오랫동안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국유화  중앙집중 통제말고 과거의 철학은 이제 끌어내야 합니다." 말했다.

 

 수천 건의 파산과 높은 실업률이 뒤를 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영국은 전례 없이 분열했다. 대처는 정부지출을 늘려 고통을 줄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케인스 주의자들과 다투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내가 할 말은 단 하나입니다" 원하다면 당신들과 과거로 돌아가세요 숙녀는 방향을 바꾸지 않는답니다."  영국에서 전선이 형성될 무렵 미국에서는 이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979년 미국

 

미국에 분위기는 매우 침울했다. 카터 대통령을 미국 사회가 침체와 자신감 상실에 대해서  자주 얘기했다. 이란혁명은 2차 오일쇼크로 이어졌고 또 테헤란에는 미국인들이 인질도 잡혀 있었다. 규제 철폐가 시작되었음에도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은 지속되고 있었다. 카터는 케인스의 처방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레이건은 마가렛 대처와 같은 경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건은 20년 이상 케인스의 정부주도 경제가 아닌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자유시장 경제 이론을 지지했다.

 

" 현 대통령은 문제를 해결한다며 국민과 기업 봉급생활자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늘리려 합니다. 사실문제는 정부의 지나친 간섭 때문에 생겨나는데 말이죠"  미국은 변화를 선택했고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밀턴 프리드먼은 "당시 상황은 이랬습니다. 인플레이션은 낮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화긴축이었습니다. 그러나 통화긴축을 하면 일시적인 경기침체는 불가피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전 미 국무장관 조지 슐츠는 " 경기 침체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실엄률이 10%에 달했다. 그 누구도 얼마나 혹독한 시기가 올 것인지 알지 못했다.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은 서민들이었다. 한 농부는 '1980년에 이자는 20%까지 올랐습니다. 정말 대단한 시기였죠 상황이 나빠지면서 현금 흐름이 경색됐습니다. 채권자들은 자산 매각을 강요했습니다.'

 

  폴 볼커 전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에 취임 당시 1978년 8월 우대금리가 21.5%에 달했다. 고통은 3년이나 계속됐다 사람들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1982년이 되자 인플레이션의 그림자가 거치기 시작했다. 레이건 노믹스의 4가지 핵심요소는 첫째 건실한 금융, 둘 재는 규제 철폐, 셋 재는 적정한 세율, 마지막은 제한적인 정부지출이다.

 

 1982년 대서양

 

남대서양에서도 영국의 원정군이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르헨티나가 영국의 포틀랜드령을 점령한 것이다. 마가렛 대처는 포틀랜드를 되찾기 위해 전쟁이라는 모험까지 무릅썼다. 전쟁 전 대처의 지지도는 바닥을 달리고 있었다. 포틀랜드의 승리로 대처 정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녀는 보수당 내에서 뿐만 아니라 영국 전체에서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다 국제적인 명성도 높아졌다.

 

  1945년 애틀리의 노동당 정부는 영국정부의 커맨딩하이츠 핵심산업 부분을 국가소유로 만들었다. 이 국유기업들이 대처주의 주요 공격 목표였다. 대처는" 국영산업 전체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효율성을 높일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필요하면 언제 듣지 재무부의 돈을 쓸 수 있는데 말이죠."  말했다. 대처의 계획은 국영기업들이 정부의존을 없애고 시장법칙에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대처의 가장 큰 장애물은 탄광과 탄광 노동자들이었다. 광산 노조는 영국 사회주의자들의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었다. 대처 정부와 탄광 노조 간부 간의 대립은 세계 경제사에서 중요한 경제 정치사건 중 하나였다.

 

 

 영국 탄광의 75%가 손실을 보고 있었다. 탄광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30억 달러의 정부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노조 지도자들은 정부 보조금으로 18만 명의 광부들이 일자리를 유지하고 가족들이 먹고살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지출이라고 주장했다.

 

 광부들은 1년 넘게 저항했다. 그러나 노조의 내부 분열과 일터로 돌아가고 싶은 많은 광부들의 요구로 파업은 끝이 났다. 대처의 자유시장정책에 반대 노선을 취했던 노동당에게 탄광 노조의 패배는 가장 큰 정치적 타격이었다.

 

  정부가 해낸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민영화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은 국가소유기업 국영산업의 주식을 민간에 파는 것이다. 대처 정부는 영국의 핵심산업 부분을 시장에  하나씩 내놓았다. 전기, 전화, 석유, 가스, 석탄, 철강과 항공 심지어 수도까지 민영화의 대상이었다.  얼마 후 국영산업은 2/3 분  정부 통제에서 벗어나 민간 부분에 매각됐다.

 

  누가 국가 중추를 통제해야 하는가? 정부인가? 시장인가? 영국에서 승패는 갈렸다.

 

  전 세계가 대처와 그녀의 원칙을 따라 했다. 아시아, 중남미 심지어 아프리카 중동국가들도 어느 정도는 대처를 모방했다.

대처와 레이건이 우연히 같은 시기에 집권함으로써 세계는 시장기반 경제 통화정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20세기를 돌아보면 경제철학면에서 커다란 주기를 발견할 수 있다 20세기 초 작은 정부론이 지배적인 흐름이었다면 20세기 중반은 큰 정부론이 주도했다. 20세기말에는 다시 작은 정부론이 실질적으로 되돌아왔다.

 

  이러한 변화에 있어서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레이건과 대처가 각각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새로운 경기침체에 불황 때론 전쟁이 닥칠 때 사람들은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주기를 바랄 것인가? 오직 시간만이 이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