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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타리/경제의 다양한 이야기

제1편 경제 이념전쟁

by thanks tree 2023.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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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경제 이념전쟁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경제전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어떤 사람은 세계화를 두려워했고 그 효과에 의문을 제기했다. 모든 사람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오늘날 불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위기들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테러리즘은 과연 세계화의 어두운 얼굴인가?

 

  이것은 글로벌경제의 탄생배경, 즉 정부가 시장이 세계경제의 패권을 놓고 벌인 100년 동안의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20세기 지식인들은 무엇이 인류에 바람직한 경제체제인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정치인들은 그것을 국가의 경제이념으로 만들기 위해 투쟁했다.

 

  글로벌 경제는 기술과 정치의 변화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생각의 혁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금융위기의 근본적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자본주의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정착하게 되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커맨딩하이츠(Commanding Height)는 1992년 레닌이 소련 공산당과 전당대회에서 처음사용, 한 국가의 경제를 주도하는 기간산업 또는 주도하는 세력을 의미한다. 커맨딩하이츠, 정부와 시장 어느 쪽이 주도하는지에 대해 이념적 대결,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와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1899~1992)로 대표할 수 있다.

 

  케인즈의 정부가 시장을 통제하고 재정의 역할을 확대함으로써 수요를 늘리고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 1970년대 초까지 케인즈 이론이 득세한다.

 

  그러나 1973년 1차 오일 쇼크 발생 후 하이에크는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자유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여 1974년 신자유주의 이론적 기초 확립으로 노벨상 수상하였다. 이후 대처, 레이건의 경제정책의 이론적 토대로 채택되어 지금까지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1940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하이에크, 케인즈는 개인적으로 친구였으나 학문적으로는 라이벌 그들 사이에서 벌여졌던 이념전쟁은 아직도 우리들 삶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100년간 경제전쟁의 핵심은 시장 기반 경제가 옳은지 또는 구가 계획 경제가 옳은지에 관한 것이었다. 케인즈의 사상은 수십 년간 서구 세계의 경제를 지배했다. 즉 시장 경제는 통제하기 어렵기에 상황이 어려워지면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하이에크는 시장이 자기 조절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20세기초 전화, 전보의 기술은 통신을 혁명적으로 바꿔 놓았다. 전기선과 철도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시켰다 이에 대해서 케인즈는 변화하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며 세계화되어 가고 있다  반에 하이에크는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깨닫지 못했다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2천만 명의 목숨을 잃었고 유럽 대륙은 폐허로 변했다 이로 인해 대 격변을 가져왔고 사람들의 환상은 깨졌고 현실은 고달팠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 것처럼 믿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봉건질서 무너트려 더 나은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칼 마르크스의 경제이념으로 무장한 볼셰비키는 자본주의 분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 지도자 레닌은 세계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 경제에 대항에 단합하자고 촉구했다. 혁명은 교역과 상업, 사유재산은 범죄로 규정했다. 레닌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종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1918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하이에크

 

 오스트리아학파 경제사상의 하이에크 특징은 "시장은 작동하지만 정부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폰 미제스는 사회주의의 큰 오류는 제대로 된 가격체계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격은 소비자와 생산자들에게 무엇이 가치를 알려주는 신호다. 즉 가격은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는 핵심요소이다 가격은 교통 신호등과 같아서 신호등이 없으면 거리의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1920년 모스크바 크렘린

 

레닌 신경제정책 수립 농부들의 농산품 판매를 허용 농지 소유권도 부여 소규모 사업 허용하면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레닌의 좌파 동료들은 레닌이 볼셰비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을 버렸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레닌은 철강, 철도, 석탄 등 중공업, 즉 그가 경제의 커맨딩하이츠(핵심부문)이라고 불렀던 것들은 앞으로도 국가와 정부 그리고 볼셰비키가 통제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후 레닌의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은 역사가 자신들에 편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죽은 지 30년도 안돼 러시아를 비롯하여 유럽, 중국등 인류의 1/3분 이상이 마르크스 경제주의 사상 속에서 살게 됐다.

 

조셉 스탈린은 국가에 의한 중앙경제를 도입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공산당은 경제의 모든 것을 계획하고 관리했다 공산주의가 확산될수록 자본주의는 곧 사라질 운명처럼 보였다.

 

 193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케인즈 예측대로 평화의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고 있었다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더 많은 화폐를 찍어내고 있었다 그 결과는 인플레이션, 더블 인플레이션, 하이퍼 인플레이션이었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단기간에 발생하는 심한 물가상승 현상, 전쟁, 대 재해 후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여 생긴다.

 

 사람들이 돈을 수레에 싣고 다녔고 빵 한 덩이 가격이 수십억 마르크에 달했다. 당시 통계연구원에 다니던 하이에크의 임금은 8개월 사이에 200번이나 인상됐다. 백만 마르키 지폐는 난로에 땔감으로 사용됐다. 1913년 12 마르크 신발이 1923년 32조 마르크 신발, 맥주 한잔 10억 마르크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나치와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지했다.

 

  1920년 뉴욕, 번영

 

  1920년대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도시들은 호황을 맞고 있었다. 그리고 주식을 엄청나게 샀다. 1920년대 라디오는 오늘날의 인터넷과 같이 갑자기 세상에 등장한 매체였다 RCA 가 주당 1.5달러에서 몇 년 만에 600달러 까지 치솟았다. 미국인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그 거품은 마침내 터지기 시작했다. 주가는 급락했고 추락은 끝이 없었다. 1930년대 완전히 붕괴의 시대였다. 사람들의 절망 자산가치의 붕괴 사람들이 더 이상 돈을 벌 수도 갚을 수도  쓸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추락  농기구 판매상 옷가게 상인 등 모두가 추락했다 그것은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대량인출사태가 벌어졌다.

 

  1936년 유럽

 

  은행도산, 산업도 무너졌다. 영국에서도 참전용사들이 전국을 돌며 일자리 달라고 요구했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전혀 성격이 다른 행진이 벌어졌다. 실패한 자본주의 대신 파시즘이 힘을 얻고 있었다. 

 케인즈는 위기는 극복하기 위해 대공황의 원인과 대책을 다룬 책을 집필 그의 목표는 경제 원칙을 다시 쓰는 것이었다.

 

 1936년 미국 워싱턴 DC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뉴딜 정책은 전쟁이었다. 그들은 대공황과 전쟁 중이었고 실업자와 굶주린 사람들 위해 즉각적인 구호 정책을 내놓았다.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댐과 고속도로, 국립공원을 건설했다. 동시에 전례 없이 강력한 자본주의 규제 방안을 만들었다. 이른바 고삐 풀린 시장의 무모함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한 예로 뉴딜정책 입안자들은 자신들이 개입해 항공산업을 안정시켜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정부가 항공요금과 항로까지 결정해 주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개입을 하자 호황을 누리다 갑자기 파산하는 항공업계의 악순환이 사라졌다.

 

  1936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1936년 케인즈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출간 정부가 국가경제를  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케인즈는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가 됐다.

 

 케인즈가 실업해결책을 정부가 지출을 확대해 완전 고용을 이루고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즉 정부 지출이 경제 상황과 반대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황기에는 지출을 줄여 잉여자금을 줄여 비축하고 대공황 같은 불황기에는 적자를 내더라도 지출을 늘려 사람들의 구매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핵심은 그들이 부채의 증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41년 2차 세계대전 발발 세계대전으로 케인주의는 미국 정부 정책의 됐다. 정부가 돈을 빌려 전쟁에 쏟아부으면서 실업률이 낮아졌고 대공황은 사라졌다.

 

  케인즈는 만약 군비지출로 실업을 해결했다면 우리는 이미 위대한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때론 악으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전시경험을 통해 평화시에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을 한 두 가지는 배우게 될 것이다.

 

  1944년 런던

 

1944년 하이에크[예종의 길] 출간, 케인즈를 비판했다. 지나치게 많은 계획을 세운 정부는 그 힘이 지나치게 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경제에 지나치게 큰 힘을 발휘하면 자유를 말살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이에크에 있어 계획경제란 전체주의로 가는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하이에크는 거시경제를 반대, 그는 대공황 때에도 정부의 개입을 반대했다. 반면 케인즈는 행동주의자였다. 그는 어차피 우리가 모두 죽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잘못을 고치려는 노력 없이 모든 것을 방임한다면 수많은 히틀러를 수많은 전쟁, 수많은 스탈린을 양산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을까요?

  

  1944년 미국 뉴햄프셔 브레튼 우즈

 

전후의 경제체제를 대비하기 위해 전 세계의 대표들이 모여 있었다. 세계은행과 IMF가 탄생 두 기구는 세계경제를 안정시키고 실업률, 경기불황을 예방하기 위한 고안된 것이다.

 

  1945년 유럽전선 승전일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었던 미국, 영국, 소련은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회담 유럽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청사진을 만들 계획이었다. 경제 체제가 달랐던 만큼 세 나라가 제시한 유럽의 번영 방향도 제 각각이었다. 변수는 아직 남아있는 대공황의 그림자였다.

 

  1945년 영국

 

군인들이 전쟁터에 돌아왔을 때 영국에서는 총선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국으로 돌아온 군인들은 모두 다시는 실업 대공황 또는 파시즘이나 군비 증강을 원치 않는다고 외쳤다.

 

  노동당을 이러한 공정분배와 계획경제 그리고 정부통제가 전후에도 지속돼야 한다는 입찰을 갖고 있었다. 보수당 180표 노동당 364표  사람들은 영국식 사회주의에 포를 던졌다. 노동당의 집권은 1930년대 대공황을 겪은 사람들 대 다수가 지지해 준 덕분이다.

 

  그들은 처칠이 전시 지도자로서는 괜찮었지만 평화시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노동당은 영국 국유기업들과 소규모 사기업들이 공존하는 혼합경제를 만들어냈다. 국유화된 철강 철도 석탄 산업들은 이젠  개인 소유주와 주주들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게 됐다.

 

  그것은 일종의 쇄신이었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리고 희망이었다 영국 국민들에게 복지국가와 국민건강보험, 완전고용, 노동조합의 권리를 안겨주었다. 국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를 제공했다.

 

  러시아는 전쟁이 끝날 무렵 군사적 산업적으로 강대국이 되어있었다. 레닌과 스탈린의 계획경제는 파시즘을 패배시켰다. 과학적인 사회주의가 대세인 것처럼 보였다. 세계는 분열했고 냉전이 시작됐다.

 

  1947년 스위스 몽 페를랑

 

하이에크와 창석자들은 전 세계가 계획경제로 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런 움직임에 대항할 지적흐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세계는 철의 장막과 소련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동유럽 국가들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데 실패했고 전쟁의 경험 때문에 어디서나 집단주의가 먹혀들고 있었다.

 

 우리의 논지는 자유경제 없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유경제는 민주주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자들에게서는 반드시 한 가지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주의의 가장 큰 장점은 용기 있게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론을 만들고 비전과 계획을 세워 물불 가리지 않고 추진한다는 것이다.

 

  1947년 독일 베를린

 

전쟁으로 독일은 폐허가 됐다. 산업은 붕괴했고 시장도 무어졌다 소련은 동독을 점령했고 서독도 곧 자신들의 통제하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과 영국의 점령지에서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의 광풍으로 독일 화폐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경제 책임자로 임명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자유시장 경제학자였다. 그는 연합군의 규제정책이 가뜩이나 악화된 경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임금과 가격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잡으려 그러나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암시장이 생겨났고 미국 담배가 실질적인 화폐역할 담배은 소규모 거래의 지불수단이었다. 대규모 거래에서는 코냑이 돈 대신 사용되었다. 이에 점령군은 새 화폐 도입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에르바르트는  미 점령군의 뜻을 거스르며 모든 가격통제를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하룻밤 사이에 암시장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사재기를 멈추었다. 십여 년간 자취를 감추었던 상품들이 시장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자유가격이 시행되면서 시장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경제 기적은 시작되었다. 독일이 채택한 경제모델은 시장과 복지국가를 결합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