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도박만큼 사람의 열정을 부축인 것은 없을 것이다. 도박은 악습이다 오락이며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이다. 빈손으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이다 도박은 로맨틱한 오락이다 아드레날린이 쏟아져 나오고 위험부담도 크로 턱시도 입고 카지노를 걸어 들어가면 마치 제임스 본드가 된 기분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성과 재산을 좀 먹는 괴물이기도 하다 때때로 이들에게는 중독성이 강하다 그 행위 자체에 중독되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데 도박을 이용한다. 도박은 정부에서 조장하는 유일한 중독성 도박이다. 도가 지나칠 때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라스베이거스는 초기에는 폭력배들이 운용했다. 도덕론자들은 도박을 파괴적인 악습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도박은 미국의 가장 화려한 순간들을 창조해 냈다. 미국 도박꾼들은 강철 같은 배짱과 자금력 비정한 승부욕과 전 재산을 걸 수 있는 담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즉 따거나 잃는 냉정한 승부의 세계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도박의 열풍이 미 전역에 몰아쳤다. 합법적인 도박만 보면 연간 6백만 달러돈이 도박판에서 굴러갔다. 도박은 라스베이거스 도시를 미국최대의 상업도시로 성장시켜 놓았고 억눌렀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자부심을 가난한 자들에게는 부의 꿈을 가져다주었다.
진짜 도박꾼은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뜯고 배가 아파 구르게 만들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미끼가 필요하다.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하기 때문에 일단 사람들이 들어오면 마법을 쓴다. 미국의 도박은 초기 원주민들에게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도박을 신성한 의식처럼 여겼다. 라크로스나 책 같은 원시게임에서 경합을 벌이곤 했다. 주사위나 뼛조각 던지기 등이 게임이 사랑을 받았다. 초장기 미국인들은 말이나 기타 재산을 걸고 놀음을 하곤 했다. 이들은 부족들 사이에서 부와 재분배하는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도박을 했던 것이다.
놀음꾼들은 돈이 없을 때는 자신의 자유를 팔아넘기는 것은 다반사였다. 놀음에 질 경우 스스로는 노예로 넘기는 것이다. 영국인들이 17세기 제임스 타운에 처음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은 도박에 빠짐으로써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모험심을 그래로 반영했다.
영국에서는 주사위나 카드놀이가 도박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고 1610년까지 7마리 경주마들이 버지니아에 도착했다.
영국 상류사회의 인기 스포츠인 경마는 곧 대중적인 스포츠가 되었고 떠들썩한 일반 관중들로 불러 모았다. 식민지들은 돈을 벌 수 있는 근거를 마련을 위해 왜냐하면 은행도 세금제도도 없었기에 복권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 뒤 100년 동안 복권 발행업자들은 도로 건설에서부터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대학 같은 교육시설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자금을 기부했다. 바야흐로 복권 사업은 나라에 이득을 주는 실질적이고 합법적인 형태로 인식되었다 귀족들은 한창 일손이 필요한데 일손이 부족 나태심을 조장한다고 인식했다.
이미 전선은 형성되고 있었다. 한쪽은 도적주의자들과 정부 반대쪽은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었던 근로자들이었다. 확산되는 부패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 영국정부는 식민지를 지원하다는 명분에 모든 복권에 판매를 전격 금지 시켰다. 식민 통치자들은 다른 수단을 찾아야 했다.
미국 독립 직전 영국은 현금이 필요했다 조지 워싱턴 장권의 독립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첫 지원을 맡은 국민복권은 독립혁명 지원하기 위해 창설됐다. 총 10만 장의 복권이 팔렸고 5년 동안 5달러에서 20만 달러까지 당첨액을 법정화폐로 지불되었다.
같은 해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토마스 재퍼슨은 이렇게 선언했다. '도박은 신성한 인간을 좀먹고 인류에 대한 적개심을 키울 뿐이다' 독립 혁명전쟁 이후 미국의 인구가 경의적으로 증가 미국인들은 어렵게 이루어낸 독립 이후 생활관이 달라졌고 모든 사회계층에서 도박을 즐기게 됐다.
정치적 야망을 지닌 지방출신 도박꾼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잭슨은 경주마 그레이하운드와 대결을 벌여 승리를 거둔 인물이다 잭슨은 '돈을 따려면 모험을 하라'처럼 실제 경기에서도 그렇게 했다.
뉴올리언스에 최초의 상업적 카지노가 생겼다. 1800년대 도박이 성행하자 입법부에서는 양성화 주장과 반대쪽에서는 도덕주의자들은 미시시피의 빅스버그를 무역을 바탕으로 성장한 도시를 지옥이나 도박장으로 지칭했지만 도박이 지역사회의 원동력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강을 따라 빅스버그 같은 도박장들이 줄줄이 건설되었다. 거의 예외 없이 불법도박이 성행했다. 1835년 빅스버그에서 도박꾼들 모두 떠나라는 명을 했다. 그리하여 자경단은 도박장에 습격하고 무력으로 진압했다. 군중들은 카지노장에 갇힌 사람들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도박장에서 끌어내 교수형을 집행했다.
빅스버그는 정화되었다. 도박꾼들은 이제 새로운 도박의 무대를 찾아야만 했다. 빅스버그 사태는 도박에 대항하는 대규모 사건의 도화선이 됐다. 그래서 상선이 새로운 도박꾼들의 장소가 되었다. 배가 정박하는 곳마다 새로운 희생자를 찾을 수 있고 배에서 내리면 또다시 사기를 칠 수 있고 육로로 다음 도시로 옮기면 늘 하던 대로 사기를 친다. 법망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사기당한 사람들 보다 항상 먼저 나갔다.
상선의 화물칸에서는 갑판원들과 농장주 노예들이 모여 주사위와 카드놀이를 했고 2층에서는 백인들이 호화로운 도박을 했다. 도박은 상대하는 일반인들은 도박꾼들이 팀으로 움직이는 것을 전혀 몰랐다. 늘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고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었지만 모두 한통속이었다.
그런 식으로 함께 움직이면서 사람들이 돈을 뜯어낸 것이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도박꾼들은 서로를 모른 척했다. 한 도박꾼이 다른 도박꾼에게 같은 테이블에 앉는 순진한 초보자에게 손짓과 몸동작으로 전달하는 수법이었다. 간혹 바텐더나 승무원들이 이들과 한패를 이루는 경우도 많았다.
카드에 정기적인 표시를 하거나 깎아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도 상상을 초월하는 속임수까지 등장해서 카드만 뒤집기만 하면 원하는 패가 나오는 정도였다.
도박이 최고조에 달하던 1800년대에는 선박 700대에서 2천여 명의 도박꾼들이 활동했다. 상선에 도박꾼들은 로맨틱한 모험에 상징이었다. 늘 여행을 하며 잘 차려입은 이들은 마지막 승객에 돈을 털 때까지 이들은 상선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잃을지라도 도박 자체에 매력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다음배가 들어오기 전 어느 날 도박꾼 캐나다 빌은 명언을 했다'내가 미국에 그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땄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돈을 지켜내지 못했다. 타로게임을 하지 않았다면 진정한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 배팅을 한때쯤 남북전쟁이 일어나 미시시피의 상선들도 운항을 중단했다.
로맨틱한 유람선이 전함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상선 도박꾼들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됐다. 상선시대의 도박의 마지막은 두 상선의 경주와 함께 막을 내렸으나 전문 도박꾼들은 돈과 무법이 판치는 서부 금광을 찾아 이미 강을 떠난 지 오래였다.
수천 명의 도박꾼들이 서부에 몰려들었다. 여기저기에서 금맥이 솟아지는 땅이라면 서부는 기회의 땅이었다. 새로운 개척지마다 금이든 은이든 목숨을 걸고 말겠다는 젊은이들로 넘쳐났고 있었다. 낮에는 할 일이 많았지만 밤에는 도박을 하는 일 밖에 없었다.
개척지 생활은 거칠지 짝이 없었다. 열정과 자유는 도박과 폭력으로 얼룩지길 일 수였다. 한 도시가 고갈되면 또 다른 도시가 생겨나길 일 수였다. 자연스럽게 전문 도박꾼들이 각 도시에 원정을 나갔고 금광업자들에 돈을 바닥날 때까지 일시적인 도박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에도 큰 광맥이 있어 샌프란시스코는 도박에 메카로 불리기도 했다. 골드러시는 현대적인 카지노를 건설했다. 멕시코인이든 중국인이든 미국인이든 누구나 베팅할 수 있었다.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수많은 불법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딜러 중 처음으로 여자 딜러인 엘니나의 등장이었다. 그녀가 등장한 첫해에 모든 카지노에서 여성딜러가 등장했다. 당시에는 여자에게 돈을 잃는 것이 유쾌하게 받아들여 카지노 매출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그러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경찰이 낮에는 뇌물을 받아 챙기고 밤에는 도박으로 날리곤 했다.
도덕주의자들은 도박장들에게 빅스버그를 기억하라 경고의 메시지를 날렸다. 그 메시지를 섰던 킹이 살해되자 군중들은 감옥으로 몰려가 두 명을 도박꾼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는 도덕주의자들은 온 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지기 전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한 셈이다.
데드우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직업은 변호사이지만 젊은 도박꾼이었던 와이어 귀신 잡는 총솜씨로 이름을 떨친 치과의사 출신 홀리데이 이들은 데드우드에서 한 수 배운 후 서부에서 악명을 떨쳤다. 데드우드의 보안관 히콕은 절대 문을 등지고 않지 않았다. 누군가 들어와 자신의 등을 쏠지도 모는다는 생각에
도박업은 흥망성쇠를 되풀이했다. 19세기말까지 미 전역을 휩쓴 복권은 더 기복이 심했다. 복권에 쇠퇴는 모든 도박산업에 몰락으로 이어졌다. 1800년대 들어오면서 마권업자와 도박꾼들이 경마에 다시 몰리기 시작했다 마권업자의 유래는 '마권을 받는 사람, 내기를 기록하는 사람'에서 유래했다.
마권업자들은 돈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했다. 경마가 성행을 얻는데 주요 원인은 마권 영업소에 있었다. 직접 경마장에 나가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마권업자들은 대부분 경주마를 소유하고 있었다. 즉 이해가 상충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유명한 도박꾼들도 경주마를 갖고 있었다.
이로써 내부거래와 불법거래가 비일비재했다. 경마의 부패를 없애보고자 한 젊은이 스미스는 놀라운 기억력과 통찰력 뛰어난 숫자감각 그리고 자신이 지켜보는 한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을 깨달았다. 스미스의 유명한 적수는 실업가로서 철조망 판매업자는 백만 달러의 사나이 존게이츠였다.
그는 '인생은 도박이며 그 어떤 것도 도전할 가치가 있다' 믿는 것이었다. 그는 파리가 젖은 설탕에 언제쯤 앉을까에 내기도 걸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도박과 내기의 또 다른 형태로 보는 사람이었다. 도박은 하지 말라는 것은 바람을 멈추라고 말하는 거와 같다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 후 다시 경마가 성행하기 시작했고 베팅의 형태가 수정되었다 구두 베팅 개인 간의 동의 형식 마권업자들은 사전승인을 받아야 했다. 즉 쉬쉬하면서 베팅을 한 것이다 새로운 베팅으로 레이오프 베팅은 감당할 수 없는 소규모 마권업자들의 돌파구였다. 즉 더 큰 물주 마권업자를 물색해 놓고 질 경우 손해액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대부분의 거래가 주 경계를 넘나들었고 이 경우 관계당국이 눈을 감아주는 게 다반사였다. 리스원은 어떤 절차가 나올지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과감한 베팅을 서슴지 않았다. 월드 시리즈 매수 사건으로 돈을 받고 고의적으로 져주기로 한 것이다. 도박과 지하세계는 1919년 다시 손을 잡았고 이후 20년 동안 유대는 더욱 곤고해졌다.
사막에 작은 도시 하나가 영원한 도박의 도시로 탈바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20년대는 밀주와 도박이 연이어 된서리를 맞아오면서 모든 것이 금지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대다수의 중에서 도박은 범죄행위로 규정했다. 1930년대 미국 전체 경제 공황이 몰아닥치자 네바다주는 도박의 부흥시대로 들어서게 한 두 가지 중요한 법제정을 한다.
1931년 자금원이 필요하다 또 하나는 이혼법을 새롭게 제정한다. 또 카지노를 지어 합법화하여 세금을 부과했다.
'다큐멘타리 > 경제의 다양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본의 힘 1 탐욕의 시작 (0) | 2023.12.20 |
---|---|
도박의 역사 2 (0) | 2023.12.20 |
황금의 역사 4 (0) | 2023.12.16 |
황금의 역사 3 (0) | 2023.12.15 |
황금의 역사 2 (0) | 2023.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