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풍문과 전설 환상을 따라서 금을 찾아 나섰다. 어떤 사람들은 부를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어떤 사람들은 신성을 쫒았다. 어느 누구도 금에 대한 마법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없었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보물 찾기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십계명이 적힌 석판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금으로 만든 상자 안에 있었다. 계약서 궤로 불리는 이 거룩한 상자가 사라진 보물에 대한 가장 오래된 역사상 보물이다.
계약의 궤와 장식 촛대 향을 놓는 재단 재단에 올린 빵그릇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초 바벨론 인들이 예루살렘을 침략했을 때 예언자 예레미아가 신전을 동굴에 숨겼다고 한다.
1947년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 발견과 1952년 쿤란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동판에 단서가 있었다. 8년 후 그 내용이 출판됐을 때 보물에 대한 정보로 가득했다. '아코로 계곡에 있는 브레바의 옛터에서 동쪽으로 12m 가보면 17 달란트가 나가는 은상자가 있다. 세 번째 돌무덤에 100개 금괴가 있다'라는 내용이다 동판의 내용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동판을 보물지도로 삼은 학자 존슨은 처음 10년 동안 비슷한 지형을 찾아다녔다. 항공사진을 통해서, [사막의 물줄기] 책을 쓴 저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 후 20년 동안 존스는 많은 동굴들을 발굴했다. 1988년 4월 결국 그의 인내심에 성과가 있었다. 동굴 안에서 이스라엘의 축성할 때 사용되는 성수가 담긴 작은 단지를 발견했다. 동판에 언급된 3가지를 발견해 낸 것이다.
1994년 레이더 탐지기로 탐사해 본 결과 엄청난 발견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이론은 아직 논란에 대상이 되고 있다. 그가 계약의 궤를 정말 찾는다면 정말 중요한 발견이 될 것이다. 이는 과거의 유물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발굴하는 것이다.
450년 전 뜬소문 하나가 가장 유명한 선례를 남겼다. 목표는 전설의 7개의 황금도시였다. 그러나 이번 탐험 또한 재앙으로 막을 내렸다. 1928년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금을 찾아 플로리다 잡목 숲으로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기나긴 원정길에서 4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사실을 안고 돌아왔다. 지금에 뉴멕시코 지역에 엄청난 보물이 있다는 것이다. 28살 스페인 귀족 돈 바이크 코로나도는 황금도시를 찾는 것이 신세계에서 영광을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믿었다.
1540년 2월 300명의 군대를 이끌고 7개 도시를 찾아나 썼다. 타는 듯한 무더운 날의 5달이 지난 후 뉴멕시코에 도착했는데 먼지 쌓인 인디어 도시 푸에블루가 전부였다. 어디에도 금은 없었다. 며칠 후 멀리 떨어진 부족에서 잡혀온 포로가 동쪽에 퀴비에라는 황금도시가 있다는 말을 하자. 코로나도는 다시 희망을 가졌다. 코로나도가 원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코로나도가 '얼마나 더 가야 되냐?' 물을 때마다 인디언은 '조금 더' 말만 계속했다.
이는 황금도시는 언제나 다음 도시에 너머에 있었고 또 다음 도시가 아니면 다음 강건에 있었다. 아무도 황금도시를 발견할 수 없었다. 1593년 월터롤리 탐험가 남아메리카 전설적인 아마존의 금을 찾아 나섰다. 스페인이 화려한 아즈텍과 잉카제국을 정복했을 때 그들은 엄청난 금 장신구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금광은 찾을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전설로 스페인들의 정복자들은 몰아내기 위한 허구였을 가능성이 높다
1576년 10개월 후 월터롤리는 경우 한 줌에 금만 가지고 영국에 돌아왔다. 1617년 엘도라도 2차 여정 중 스페인 식민지 약탈 영국에서 처형되었다. 처형장의 칼 날앞에서 '이 날카로운 칼날이 내 병을 모두 치료해 주겠구나 금에 대한 내 열정 까지도'라고 말했다.
금은 아주 매혹적이고 신비한 마법에 금속이어서 수 천년 동안 사람들은 금을 찾기 위해 어떤 위험도 감수했다.
슈퍼스티션 산맥 이 전설은 진실보다 신화에 가깝다 전설은 5세기 전 코로나도가 7개가 황금도시를 찾아 남서쪽으로 헤매고 다니면서 시작됐다. 1877년 슈퍼스티션 산맥에서 금광을 발견했다고 했으나 당사자 왈츠가 금덩이를 들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금을 찾아 여기까지 오는 이들은 금광에 대한 확산을 저버리지 않았다. 자랄 때부터 금에 대한 얘기는 수 도 없이 들었는데 다들 다름 아닌 1년만 더 한 달 만 더 하루만 더 있다면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유언으로 남긴 사람도 있었다.
대피라미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피라미드다 이곳에서 파라오들은 엄청난 양의 금과 함께 사후세계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고 믿었다. 고대 이집트 인들은 사후 세계를 믿었기에 사후 세계를 준비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파라오들의 무덤은 대 자연의 파괴에는 끄떡없었다면 인간의 약탈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917년 영국에 이집트 학자 하워드 카터는 역사에서 소외되고 이집트에서 거들떠보지 않는 어린 파라오의 무덤을 찾기 시작했다. 파라오 투카카맨은 18세기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년 동안 발굴 작업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그래나 마지막 발굴 작업 중에 5000천 이상의 보물과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등을 발견했다.
2년 동안 왕들 무덤을 계속해서 발굴 작업을 벌이는 동안 카터는 쿠탕카맨의 아름다운 보물들은 하나씩 운반했다. 그러나 이집트 정부와 지분문제로 실랑이가 끊이지 않았다. 하워드 카터는 자신이 발견한 위대한 보물을 소유할 수 없었다.
플로리다 해역을 오고 가는 많은 배들이 선적한 많은 짐들도 바다에 침몰된 많은 보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바닷속 깊은 곳에는 많은 금을 싣고 가던 스페인 함대의 잔해로 가득하다. 보물 추적자 멜피셔는 1715년 플로리다 해역에서 침몰된 스페인 함대였다.
그 후 금속탐지기로 20만 km가 되는 해저를 탐지하고 다녔다. 1년 후 5만 불 정도의 금화를 끌어올렸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그의 목표는 17세기 스페인 상선 아토차호였다 보물을 가득 실은 함대에 가장 커다란 위협은 약탈을 일삼는 해적들이 아니고 바로 날씨였다. 헤리케인으로 아토차호가 침몰했다.
1970년 피셔는 아토차호를 찾기 시작했다. 4년 후 중요한 단서가 대서양 넘어 먼지 쌓인 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 나중에 잡지 기사가 잘못된 것이 밝혀졌다. 희망은 있었지만 자금부족에 빚쟁이들과 싸워야 했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보물을 찾기 위해서 전에 발견한 소량의 모든 보물을 팔아야만 했다.
피셔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매일 이렇게 말했다'바로 오늘이다'
1975년 배가 전복되어 형과 형수 그리고 선원이 익사했다. 그 후 10년 후 아토차호를 찾았다 피셔가족은 25만 점에 보물을 들어 올리고 닦고 목록을 만들었다. 보물에 가치는 5억 달러에 달하는 것이었다.
금은 무언가가 있다. 마약과도 같다 350년간 물속에 있다 나와도 금방 반짝 빛나고 더러워지거나 녹슬지도 않고 눈부시고 아름답게 빛이 난다. 아토차호의 보물들은 노란 금속에 대한 인류의 집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콜럼버스보다 수 세기 전 잉카인들은 그들의 삶을 장식하기 위해 금을 캤고 정복자들은 그들의 금을 뺏기 위해 싸웠다. 잉카제국의 예술은 세상을 움직이는 주화가 됐으며 금이 바다에서 사라졌을 때 금은 인간에게 금과 희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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