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 이것은 부와 권력의 만국 통화이며 대제국에 초석이고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귀금속이다. 금과 화폐의 역사는 5 대륙에 걸친 6천 년에 걸친 방대한 대서사시이다. 베네치아의 대운하에서부터 캘리포니아 금광까지 아시아의 무역창고에서부터 월스트리 증권거래소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사에 버금가는 얘기를 남겼다.
기원전 3천 년경부터 금은화폐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화폐의 개념은 미숙한 상태였다.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대금을 향료나 음식처럼 가치 있는 물건들과 물물교환을 했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거래한 방식이었지만 물물교환에는 한계가 있었다.
일일이 멀리까지 가축을 들고 다닐 수 도 없는 상황이었고 더 나은 방법이 필요했다. 그 해결책은 기원전 6백 연경 리비아의 수도 사디스에서 등장했다. 리디아는 부유한 고대 왕국이었다. 세계의 대륙이 교차한 곳에서 위치한 사디스는 부피 큰 물건들을 싣고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과 군인들로 항상 넘쳐났다.
기원전 550년경 마이다스에 손을 가졌다는 크로소스 왕이 금화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왕을 화폐를 주조했고 화폐에 가치를 메기기도 했다. 화폐를 주고받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화약을 살 때도 낙타 두 마리와 교환하는 것보다 거래대금을 지불할 때도 화폐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간단했다.
때때로 은 같은 금속으로 주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금이 가장 귀중한 금속이었다. 역사상 금은 가치의 척도였다. 금에 관한 한 종교나 언어의 장벽도 없었고 1그램에 금은 중국 러시아 미국에서도 남아프리카에서도 역시 1그램에 가치가 있었다. 지중해의 공통화폐로 사디스의 금화는 역사적으로 동양과 서양을 연결해 주었다.
사디스에 금화는 아시아에서 고급실크와 형로르 들여올 때 지급한 최초의 화폐였다. 금은 무게나 부피에 비해서 가치가 매우 높았다. 주머니 속에 아주 작은 양만 가지고 있어도 효과적이기 때문에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간단한 형태의 거래가 2500년 동안 국제거래의 기본 형태로 자라 잡았으며 현대경제의 초석이 됐다. 주화 주조기술이 유럽과 아시아에 널리 퍼졌고 이제 금화가 주화의 일반 형태로 자리매김했다. 금이 돈으로 사용되면서 분명히 근간이 됐고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금광도 생산을 멈추었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여 금 공급이 뚝 끊겼고 세계는 다시 소량의 금만 생산하던 천 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4세기 초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틴누스 황제는 변하지 않고 통용되는 금화를 만들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는 오늘날 이스탄불이다. 이곳은 북부 유럽과 러시아 즉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완벽한 교차로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화려한 성공은 도전을 받게 된다. 막강한 경쟁자가 동방 무역에 뛰어든 것이다.
지중해 연안 지역 중 베네치아는 동방과 중국과 서방을 잇는 무역에 거점이었다. 또한 북아메리카와 모든 무역을 독점했다. 다른 국가들이 정복을 통해 팽창하는 동안 베네치아 인들은 상업을 기반으로 왕국을 세웠다. 베네치아는 조선업을 시작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조선업은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산업이 됐고 베네치아의 토대가 됐다.
지중해에서 조선업계의 중심이 된다. 세계 최대의 선박건조 베네치아의 선박들은 세계 모든 항구에 배를 대고 동방의 비단과 향료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갔다.
프랑스 기사들이 주축이 된 4차 십장군 원정 때 그들은 베네치아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베네치아의 총독 단돌로는 십자군의 수송을 자처했고 그것을 빌미로 십자군을 최대로 이용했다. 십자군이 성전을 논하는 동안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동방무역은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그치지 않았고 실크로드에 마지막인 중국에까지 이어졌다. 전리품에 현혹된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 함락되자 대량학살과 약탈이 행해졌다. 1204년 전 세계 해상무역 금을 기반으로 세워진 전혀 새로운 종류의 제국이었고 세계경제의 중심지였다.
당시 베네치아는 유럽 전체를 사고도 남을 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리알토 섬에서 아침마다 특별한 가격협상을 벌인 뒤 오후에 벨을 울려서 가격을 공시했다. 현재 런던 금시장에서 하던 것과 똑같은 것이다. 베네치아는 새로운 금화를 주조했고 그 후 4세기 동안 두 카드 금화가 지중해에 유통됐다. 그리고 인도 심지어 중국에서도 유통됐다.
모두들 남쪽으로 눈을 돌려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질 때 몇 사람만이 콜럼버스에 말에 즉 자기를 후원하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콜럼버스는 동방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가 발견한 곳에는 스페인이 세계대전을 장악한 만큼의 큰 금이 있었다.
대서양이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베네치아에서 대서양을 중심으로 제국이 형성됐다. 런던에서 새로운 무역상들이 생겨났고 새로운 금화가 생겨났다. 영국 금화가 1700년부터 1900년까지 국제통화의 역할은 했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역사적인 새로운 장이 열렸다. 19세기 초 신생 독립국인 미국은 성장통을 앓고 있었고 더 이상 경제는 화폐 없이는 발전할 수 없었다. 결국 미국 은행들은 지폐라는 혁명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미국은 독립전쟁 당시 최초로 지폐를 발행했다. 그러나 정부가 불허한 지폐들은 가치 하락이 불가피했다.
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는 언제든지 금의 상환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은행들이 너무 많은 지폐를 발행했다는 데 있다. 유통되는 지폐의 액면가가 금의 상환보다 훨씬 초과했다. 은행권은 금 보유고의 2~3배 되는 비율로 지폐를 찍어 냈고 지불능력도 안되면서 은행권을 마구 남발했다.
1848년 미국 은행은 돌파구를 찾았다. 캘리포니아 미국 금광은 미국 경제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21톤의 금과 500명의 승객을 실은 센트럴 아메리카호는 뉴욕으로 향해 도중 허리케인을 만나 침몰사고로 미국의 경제 공황은 깊어갔다. 한 나라가 오직 금에 의존하는 한 나라 경제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었다.
1861년 4월 10일 단 한 발에 포탄이 미국을 남북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화폐부족으로 인한 경제공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은행권을 가지고 금으로 상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비용을 지불하기 위해서 각 은행으로부터 금을 빌렸기 때문에 은행은 충분한 금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은행이 은행권을 지불할 수 없었기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러나 뉴욕의 국회의원이 혁명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린백' 정부 발행 지폐 발행을 제안했다. 은행권과 달리 그린백은 금으로 상환되지 않았다. 최초의 연방정부 발행 법정화폐였다. 단지 미국 정부가 인정했다는 이유만으로 종이쪽지가 그만큼에 가치를 갖게 됐다.
1869년 제이골드와 젬페스크는 금을 매점하는 대단한 사기를 구상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더 많은 금을 사들이면 공급량을 줄게 되어있다. 그 결과 수요가 몰리고 가격도 오르게 된다. 금값이 오르면 적당한 때에 내다 팔았고 그렇게 해서 큰돈을 벌었다.
1869년 9월 24일 갑자기 금값이 폭락하자 미국 역사상 검은 금요일로 기록된다 이로 인해 금본위 경제의 위험성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화폐의 유통량을 조절하기 위해서 통제하기 어려운 금값을 기준으로 삼아야 했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19세기말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금화를 사용하거나 금으로 상환될 수 있는 지폐를 사용함으로써 금본위제도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금본위제도도 한 세기를 넘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가장 비싼 전쟁이었다. 금 보유고는 바닥이 났고 유럽은 금 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공황이 몰아닥쳤다. 1933년 어느 토요일 미국의 경제가 휘청 거렸다. 미국인들은 지폐를 금으로 상환해 달라고 요청했고 단 일주일 만에 미국 금화의 15%가 자취를 감추었다. 은행의 최악의 날이었다.
예금주들이 한꺼번에 돈을 인출해 갔다. 미국의 은행 5000천 곳이 파산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금본위제도 포기를 법안에 서명했다. 1933~1934년에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유통 중인 금화가 모두 회수됐다. 일주일 후 은행이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예금액이 인출액을 초과했다. 금은 더 이상 화폐로 쓰이지 않았고 주화와 화폐만이 법정화폐로 쓰였다.
여전히 돈에 대한 수요가 금 공급액을 훨씬 초과한다는 오랜 숙제가 남아있었다. 전 세계가 대공황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인류 문명 전체를 위협하는 새로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을 때 독일은 패전의 영향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금보유고는 바닥이 났고 화폐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독일 국민들에게 옛 영광을 다시 안겨주겠다는 약속을 내걸고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금이 절실했다. 독일은 유럽 전체를 휩쓸면서 각 나라에 금 보유고를 약탈했다. 1945년 2월 3일 900대에 달하는 연합군의 폭격기들이 베를린에 폭격을 퍼붓었다. 도시는 황폐화 됐다.
그 후 베를린에서 실려온 엄청난 양의 트럭에 짐을 포토시 광산에 묻혀있다는 첩보를 미국군은 입수했다 7000천 개의 자루 안에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8천 개 이상의 금괴 2천 자루 이상의 독일 마르크 영국 파운드 미국의 20달러 지폐 수백 자루들의 여러 나라 금화들이 쌓여 있었다. 또한 나치 수용소에서 몰수한 금그릇 결혼반지 금이빨등이 여행가방 안에 가득했다.
모든 자료에는 목록과 함께 멜버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멜버는 수용소에서 몰수품과 금을 수송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멜버의 계좌에는 1억 달러 현재가치는 10억 달러 이상 그러나 멜버의 계좌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1946년 금의 일부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게 국제적인 보상 위원회에 맡겨졌고 나머지는 원래 빼앗긴 나라에 되돌려 주기 위해 연합국 위원회에 넘겨주었다. 유럽은 2차 세계대전 폐허로 벗어났고 미국은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로 떠올랐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은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금을 주고 달러를 사들여야만 했다. 미국의 금 보유고는 급등했고 그 대부분이 맨허턴의 연방은행 5층 짜리 지하창고에 보관됐다.
엄청난 양의 금보유량 기반으로 미 달러화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지불수단이 됐다. 나라를 사이에 부채는 달러로 지불됐다 옛 로마의 레전드 금화나 유럽의 금화처럼 달러화가 기축통화가 된 것이다 닉슨 대통령대 달러의 금교환이 정지 됐다. 화폐와 금의 연동이 끊어졌고 이제 신용이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단지 서명하나로 2천 년 전 리디아에서 시작된 거대한 경제의 중심축이 무너졌다. 오늘날의 지폐는 점차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뉴욕에서 도쿄에 이르기까지 수십억 달러의 거래는 지폐난 금이 아닌 단순한 숫자 교환으로 끝이 난다.
돈은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 버렸다. 금화 사용한 지는 2천 년이나 되었지만 지폐를 사용한 지는 2백 년 밖에 안 됐다. 그러나 신용카드가 일반화되지 않았고 돈의 가치가 매우 낮은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여전히 금만큼 귀한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