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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타리/경제의 다양한 이야기

황금의 역사 2

by thanks tree 2023.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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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한에스버그에서 엄중한 경비 속에서 헬기를 맞을 준비가 한창이다 헬기 적재물과 발송지는 엄격하게 기밀로 다루어지고 있다. 승객은 백만 달러 가치가 넘는 금이다 금은 외부하트랜드에서 캐낸 것이다 남아공에 금광은 세계초대 매장량을 자랑한다. 그리고 제일 좋다. 금광은 지표면에서 4.8km 넘는 깊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광부들은 작은 도시 정도의 크기에서 하루 24시간 금을 캔다. 광부들은 오래전부터 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금속을 캐내고 있다.

 

금만큼 인류사 문명에 큰 영향을 미친 물질은 없었을 것이다. 기원전 5백 년에 금화가 주조돼 무역거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제국들은 금에 의해 탄생됐고 몰락했다. 금은 동서양의 무역로들 연결하는 자금줄이었다. 남아메리카에서 남아공까지 사람들은 금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신대륙이 정복되고 아스텍과 잉카문명은 금을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다.

 

 반짝이는 금은 처음에 장식품을 사용하는데 쓰였다. 그리고 숭배에 대상이 됐다. 이스라엘인들은 황금 장신구를 녹여서 그 금 송아지를 만들었고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금을 태양에 땅이라고 불렀다. 옛날부터 금은 신성한  자원이라 믿어왔다 성서에는 새로이 탄생한 왕에게 금을 선물로 바치는 현자들이 이야기가 실려있다.

 

 시간과 정소를 초월해서 이집트에서 페루까지 사람들은 영원불멸에 금으로 왕궁과 신전을 장식했다. 태고적부터  금 산출량을 추정해 보면 3만에서 14만 톤의 금이 채굴되었다. 그 모든 금을 녹여 벽돌로 만든다면 워싱턴 기념답 크기 1/5은 될 것이다 우리가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이유는 금은 자연에 생산품이기 때문이다 금은 불멸에 존재이다.

 

 이집트 무덤에서 출토된 금제품은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와 똑같아 보인다. 2천 년 동안 땅에 묻혀있거나 바다에 잠겨 있다 하더라도 무게를 제어 보면 똑같을 것이다. 금은 인간이 채굴해 낸 최초의 금속일 가능성이 높다. 금은 단련이 가능하기 때문에 1온스를 길게 두들겨서 길게 늘이면 80km짜리 전선이 된다. 평평하게 펴면 100피트에 판이 만들어진다.

 

금은 강도가 높아서 금속에 제왕으로 불린다. 금은 바람이나 불, 세월에 무게에도 잘 견딘다. 이는 금처럼 특별한 성질을 가진 금속은 없다 녹슬지도 않고 영원히 빛나며 부식되지도 않는다.

 

 금은 지상 모든 대륙에서 발견되지만 자연은 금은 품 안에 꼭꼭 숨겨두고 있다. 금은 석영맥에 숨어있거나 산꼭대기 지하 깊숙이 숨어있다. 영겹에 세월 동안 바람과 비에 씻겨 주위에 둘러싼 바위가 침식돼야 비로소 금의 모습이 드러낸다. 고대인들은 강바닥이고 바위틈에서 금조각이나 금덩어리 발견하면 자기가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금에 대한 새로운 법도 제정되었다. 금은 어디에서 발견되든 그것은 군주의 재산이 되었다. 그리고 금은 채굴하는 사업은 냉혹한 사업이 됐다. 이집트인들은 루비아를 정복하자 루비안들을 금 캐는 노예로 만들었다. 로마인들이 스페인을 정복했을 때 역사 사람들은 금광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스페인 군이 페루를 점령했을 때도 페루인들은 금을 캐는 노예가 되아야 했다.

 

하지만 금은 무자비한 왕들의 소유물에서 자유를 되찾았다. 변화는 1607년 어느 날 봄날 아침에 시작됐다. 그날 버지니아에 배 세척이 닻을 내렸다. 신대륙 최초로 영국인 거주지의 제임스 바우는 금을 찾으려는 붐 때문에 생겨난 마을이었다. 최초의 이주민 중에서 금세공보다 경제공이 두 명씩 포함되어 있었다. 황금 열풍은 전염병처럼 확산되었다. 다른 이주민들도 작물 재배를 그만두고 금을 찾아 나섰다. 존 스미스 선장은 일지에 이렇게 썼다. '가장 피해가 큰 사람들은 황금빛 약속을 믿은 경제 공들 이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금은 발견되지 않았다. 발견된 것은 황철광뿐이었다.

 

  신생 독립국 미국에서 진짜 금이 발견된 것은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후였다. 1799년 어느 일요일 아팜 12살 소년이 발견한 것은 금은 6kg이었다. 리드의 가족은 그게 뭔지 몰랐다. 그들은 몇 년 후 그 지방 보석상이 찾아올 때까지 금덩어리를 문을 괴는 돌로 사용했다.

 

 보석상은  그것을 3달러 50센트에 사들였다. 실제가치가 5천 달러가 되는 것을 헐값에 사들인 것이다. 1800년대 초까지 수많은 미국인들이 금을 찾기 위해서 캘리포니아 산골짜기를 뒤졌다. 30년 동안 그들이 찾아낸 금 덕분에 금화를 주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의 발견은 드문드문 이루어졌을 뿐이다.

 

대규모 주광맥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우연한 발견은 개인들에게 금을 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중 한 명 샘브랜던은 금광촌의 공급과 수요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제재소 가서 앞으로 광부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구들을 몽땅 사들였다. 

 

 브랜던은 광부들이 때를 지어 몰려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금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떠들어 됐다. 그 소문이 오레곤 까지 퍼지자 몸이 성한 2/3가 짐을 챙겨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그들은 스스로를 '시굴자'라 불렀다. 금을 찾는 일을 새 직업으로 삼은 것이다.

 

 캘리포니아주 한 스페인 관리는 이렇게 섰다.'농부는 쟁기를 내동댕이 치고 변호사는 사건을 약사는 약을 사제들은 교서를 집어던지고 모두들 금을 캐고 있다.' 

 

배를 통해서 퍼지는 소식이 제일 빨랐다. 중국인들이 뉴욕 사람들보다 먼저 소식들 들었다. 1952년이 되자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예전보다 10배 이상 늘어나서 25만 명이나 됐다 전 세계 사람들이 '골드러시'에 뛰어든 것처럼 보였다. 기록에 의하면 인도, 유럽 각지에서도, 호주, 남미 물론 미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미국 동부에서 몰려온 8만 명의 사람들은 세 가지 이동경로를 이용했다. 마차로 도착하는대는 반년이 남미에서 배로 오는 사람들 역시 반년 파나마 지역을 건너 바다나 육지로 오는 것은 지름길이었지만 값이 가장 비쌌다. 두 달만 금을 캐면 20년 치 월급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갔던 것이다. 세상은 온통 황금 열풍에 휩싸였다.

 

 서턴의 제재소에서 금이 발견되기 전에는 모든 금은 왕이나 정복자의 재산이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는 평범한 사람들도 장소나 양에 상관없이 금을 발견하면 자기가 소유할 수 있다는 풍조를 만들어 냈다.

 

수백 년이 세월이 지나면 금은 물에 씻겨서 강을 따라  내려온다. 그것은 사금이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금이 넘쳐났지만 돈 자체는 귀했다. 제일 가까운 조폐국이 동부에 필라델피아에 있었다.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외국화폐를 사용했다.

 

 그래서 뉴욕출신 데이비드 브로드는 금가루를 산후 녹여서 동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필요한 돈을 갖게 됐다. 골드러시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부자가 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1849년 캘리포니아서 채굴된 금의 가치는 천만 달러였다. 4만 명의 광부들이 그걸 나누어 가지면 한 사람당 평균 25달러가 돌아간다. 하지만 골드러시에 현혹된 사람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1851년 캘리포니아 금 생산량은 85톤까지 늘어났다. 대부분은 동부로 보내졌다. 일 년 생산량이 연방 예산보다 많았다. 1853년 생산량이 100톤으로 증가했다

 

 맨 물이나 바닥에서 채취할 수 있는 금의 양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끝날 때가 된 것이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는 4년 동안 이어졌지만 이 서부개발에 발판이 됐다.

 

 캘리포니아의 찾아온 대규모 이민은 수백 년을 이어온 사회 경제체제를 바꾸어 놓았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때문에 인디언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골드러시는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종말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불과 5년 만에 인디언들의 인구는 150만 명에서 3만으로 줄었다. 대부분에 기아와 질병으로 희생됐고 광부들에게도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그 후 반세기동안 세계도처에 황금열풍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대규모 금광을 찾았다는 소문에 따라 시굴꾼들의 대규모 이민이 이어졌다. 1850년 호주인 시굴자는 고향에 돌아와 캘리포니아 지형과 비슷함을 보고 금이 있을 것을 알았다. 그 후 6주 후 금을 찾았다.

 

 반년도 못돼어 5만 명의 시굴자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캘리포니아에서 금을 찾아다녔던 그 사람들로 목적지가 호주로 바뀐 것뿐이다. 이 사실이 영국에도 알려졌다. 증기선 선장이 보고서 내용이다' 호주의 사회기능이 마비되었다. 삽을 들 수 있는 남자와 아이들은 모두 금을 찾아 나서고 있다. 거의 모든 식료품값이 치솟았다.' 

 

 호주는 영국의 죄수들이 형을 살았던 식민지였다. 그런 곳이 모든 사람들이 꿈을 안고 찾아오는 기회의 땅으로 변한 것이다. 1852년까지 37만 2천 명이 호주 해안에 도착했다. 하지만 골드러시의 수명은 짧았다. 불과 4년 만에 지상과 냇물에 있는 금이 동이 나고 만 것이다.

 

 캘리포니아와 호주의 골드러시는 평범한 사람들을 파트타임 시굴꾼으로 만들었다. 그 후 로키산맥으로 가자는 말이 생겨났다. 최고의 골드러시는 사금러시였다. 우리가 오늘날 지하학 방식이라는 부른 방법으로 채취됐다. 중력을 이용해서 접시 안에 담긴 소량에 물질 속에서 진짜 금을 찾아내는 것이다.

 

 레드빌은 콜로라도 로키산맥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곳에서 금이 발견된  후 30년 동안 지하에는 1600km의 갱도가 만들어졌다. 땅 속에서 금 은 아연 그리고 1878년 마을 이름이 생겨나게 만든 레드 납이 채굴됐다. 레드빌에서 15년 동안 금을 찾던 토마스 윌씨는 아주 우연히 금광을 발견했다 15년 전에는 금이 아닌 은을 시금하던 광산이었다.

 

1879년 레드빌에서 은이 발견되자 그러자 하룻밤만 지나면 수백 개의 광산이 생겨났다. 1880년대가 되자 세계적으로 은의 가치가 떨어져서 국제통화가 금 본위제로 바뀌었다. 1983년에 은 값이 완전히 폭락하고 말았다. 레드빌은 수많은 은광들은 폐광되어 버려졌다. 그 후 윌씨는 버려진 은광을 사들였다. 그는 광산들을 합병해서 머드 광산촌이라 했다. 이후 세계 최대 금광이 됐고 월씨는 엄청난 거부가 됐다. 예외적인 경우였다.

 

 마지막 기회는 알래스카에 가는 것이었다. 1876년 콜론다이크 강에서 금이 발견되자 수천 명의 시굴꾼들이 몰려들었다. 캐나다 산악 경찰은 적어도 1년 치 식량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의 길은 막았다. 캐나다 산악 경찰은 이렇게 적었다. '여행자들과 그에 따른 피해는 상상하기 힘든 정도다. 여행 도중 수천 마리 말들이 죽어 나갔고 때로는 절벽아래로 떨어졌다.'

 

 19세기에 골드러시에 불을 지핀 것은 큰 꿈을 가지고 나선 개인들이었다. 그들이 찾은 작은 금 알갱이 금덩어리가 역사를 바뀐 것이다. 금 찾기는 접시나 삽의 차원을 넘어 대규모로 발전했다. 1876년 모테일 협곡 지역에서 금이 발견됐다. 그 광산을 1년 후 홈스테이드 광산이 매수했다.  홈스테이드 금광회사의 등장은 금 채광 업계의 혁명을 선도했다.

 

  그 후  접시와 삽을 들고 혼자서 다녔던 시굴꾼들은 새로운 채굴방법으로 시굴 하는 대규모 회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가장효과적이지만 환경파괴적인 방법은 수력 굴착법이었다. 삽과 접시를 들고 일하던 시굴꾼들의 한 달 걸려 하던 일을 하루도 못돼 해치웠다. 과거의 골드러시 지역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1889년 금광회사들은 산성물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체에는 치명적이었으나 금채광에는 매우 좋았다. 채광기술에 발달은 홈스테이드 금광회사를 가장 부유한 광산으로 만들었다. 100년 동안 금 생산은 꾸준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미국에서 채굴된 전체 매장량에 10%에 불과했다.

 

 1962년 지질학자들이 네바다 산맥 1.6km 지하에서 1.6km의 금 매장지를 발견했다. 오늘날 칼전트렌드 금광회사는 크기가 1/20000 인치의 금 알갱이를 찾아내고 혁신적인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 칼전트렌드에서 금광과 현대적인 기술 덕분에 미국은 세계에서 제2위 금 생산국이 됐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트랜스 지역에 위치한 그 래즈 올리버 광산, 광산의 갱도는 지하 4.8km 갱도에 뱀처럼 길게 이어져있다. 이곳에서는 매달 평균 23만 톤의 암석과 흙이 채굴된다. 매년 이 광산은 100만 온스에 금을 생산한다. 금광업계에 이 지역이 중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인류 역사상 채굴된  40%에 달하는 금이 생산 되었기 때문이다.

 

 남아공, 호주, 미국에 금 채광업은 이제 대기업에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1900년대 되자 남아공은 전 세계의 금 공급에 1/4을 담당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깊고 가장 노동 집약적인  광산이다. 일단 지하에서 캐낸 금은 정제와 도게바라 불리는 넓적한 덩어리로 만들어진다. 무게 26kg 36시간 안에 순도 높은 금리로 만들어진다 48시간 안에 어느 은행에 보관된다

 

 작은 접시와 큰 꿈이 전부였던 시굴꾼들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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