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는 뉴욕 세계 무역센터 붕괴를 초래했고 그 강력한 충격은 그 지하 건물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틈 사이로 오랜 건축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벽이다 이벽은 네덜란드인에 의해 건설됐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월스트리트의 역사는 뉴욕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지명에서 유래된 벽에 건설과 소실 그리고 후에 금융의 중심이 됐다 모든 게 뉴욕의 성격을 대변하는듯하다 9.11 테러 후 수많은 월스트리트의 금융기관들이 이곳을 떠났다. 솔레오 회장의 업무는 월스트리트 벽을 찾는데서부터 시작된다 현대화된 도시 속에서 400년 된 유적을 찾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샘로버트 뉴욕 타임스 기자는 뉴욕은 끊임없이 변모하는 창의적 파괴를 경험했다고 누구나 말했다고 말한다 일부 남아 있는 건축물들은 원래 네덜란드인들의 소유물이었다. 네덜란드는 저지대 국가이다 국토의 1/4이 해수면보다 낮다 네덜란드인들은 농업활동에 제약을 받는 특수적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간척지들 통한 경작지를 만드는 일 외에 또 다른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13세기부터 네덜란드인들은 눈길을 돌려 해상무역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400년 전에도 암스테스르 항은 세계최고였다. 이런 우월한 인프라에 힘입어 암스테르담은 세계최대 무역집산지를 발전시켰으며 네덜란드를 근대 역사에서 가장 앞선 대국으로 들어서도록 만들었다. 158년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주권을 가진 네덜란드 공화국을 건설하면서 유럽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생공화국에선 귀족과 평민들 간에 존재했던 엄격한 계급제도가 철폐되고 세속사회에 대한 교회 통제도 역시 크게 쇠락한다. 넉넉한 경제와 종교환경은 유럽 각국 사람들은 네덜란드로 흡수하기 족했으며 그 당시 네덜란드 인구 반 이상이 외부 이민자들이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급격히 경제발전하는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네덜란드로 이주하는 이민자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시장 경쟁 역시 나날이 치열하기 됨으로써 네덜란드인들은 무역의 대상을 보다 먼 해역과 국가까지 넓혀가야 했기에 해외를 확장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원양 향해의 꿈은 네덜란드의 조선업에 급속한 발전을 가져다주었으며 16세기말에 이르러 네덜란드인의 제조한 범선이 원양 향해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네덜란드 무역회사의 수는 비록 많았지만 규모가 작아서 원양 무역에서 감당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어떻게 이런 병목을 뚫고 원양 무역에서 오는 위험요소를 해결했을까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탄생한 주식회사에서 이 문제의 유일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주식회사는 밧줄과도 같다 밧줄은 무수히 많은 셈세한 삼실로 엮어져 있는데 각각의 삼실가닥 만으로는 돗을 끌어올리지 못하지만 그 가닥들은 엮어놓으면 적은 힘이 한데 모여 견고한 밧줄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암스테르담에서 주식이 태동하기 20년 전에 영국에는 이미 주식회사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격한 등급제도 아래 몇몇에 대주주로 구성된 회사였다.
자유와 평등의 네덜란드에서는 모두 귀족과 평민은 물론 심지어 노예들까지도 주식회사의 주주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리스크를 함께 부담하고 수익을 공동 부담했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전국에서 온 100개 회사가 공동 출자 하면서 네덜란드 항구도시 6곳에서 사무소를 개설하고 네덜란드 대중들은 대상으로 650만 길더의 주식을 발생하는데 그중 암스테르담에서 발행한 주식수가 총 주식수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주식의 공개 발행을 통해 동인도 회사는 원양 무역을 위한 자금을 비축하게 된다. 영국 미국 서방국가들은 네덜란드인들이 창조한 이 주식제도를 이용했다 주식의 공개 발행을 통해서 대중들 주머니에 있던 돈을 하나로 모으고 인류시대의 활력과 창업이 넘쳐나는 공업 문명시대를 연 것이다.
주식의 형태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형태가 됐다.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때 그해 그들은 원양향해를 시작해 저 멀리 러시아까지 그 후 200년 동안 아시아로 500회 이상 출항을 하면서 약 100만의 유럽인들을 아시아와 무역을 위해 내보냈으며 250만 톤이 넘는 아시아의 물자를 유럽으로 들여왔다.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다음 해 세계최초의 주식거래소가 암스테르담에서 세워지는데 동인도회사에 대한 네덜란드의 기대치는 주식거래가격에 그대로 나타났다 10년 후 원양상선의 만선으로 돌아오자 동인도회사 주식을 보유한 사람들은 후한 대가를 받게 된다.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혁신을 거듭해 왔다. 옵션 선물 증거금 거래 공매도 시장에 존재하는 개념들이 모두 이곳에서 탄생했다.
1609년 동인도 회사 선장 헨리 허드슨은 신항로 개척을 위해 그러나 암스테르담을 벗어난 상선은 황량한 북극을 향해 내달리고 만다 5개월간의 해상 포류를 거친 상선은 오히려 북미 대륙으로 나아가기 된다 이렇게 뉴욕에 도착에 미지의 강줄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네덜란드의 해상무역 경쟁자인 스페인이 미주지역에서 식민지로 보유하자 네덜란드인들도 북미 시장을 개척하려던 중이었기에 우연에 일치로 희소식이 된 것이다.
때문에 북미 무역 독점을 위해 1621년에 서인도 무역회사를 설립한다 5년 후 서인도 회사은 60달러의 상당에 천과 장식품으로 인디언 수중에 있던 맨해튼의 소유권과 맞바뀌었다. 이는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교역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그 당시의 맨해튼은 황무지에 불과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금싸라기 땅인 국제금융지로 발전하리라곤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무역의 확대와 상인들의 증가에 따라 맨해튼 남단에 네덜란드인들이 영구적인 거쳐를 마련하면서 이곳에 새로운 도시가 탄생했는데 뉴암스테르담이라 불렀다. 자신들의 자산과 신변의 안전을 위해 뉴 암스테르담 북부에 벽을 건설하기게 됐는데 월스트리트의 역사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국 금융사학자 존고든은 '네덜란드인들이 뉴욕에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한 것은 다른 식민지 국가들처럼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청교도가 매사추세츠 중에 천주교는 메릴랜드 주 퀘이커가 펜실베이니아주에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같이 신에 대한 숭배를 위한 것이었지만 네덜란드인들이 온 이유는 오로지 돈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
17세기에 네덜란드는 해상의 마부라 불리었으며 암스테르담 역시 세계 최대 상업무역 중심이었다. 암스테르담 기록보관소에는 당시 각국에 상인들이 상업활동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형성된 상호 간의 두터운 신용은 비즈니스 영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각국의 화폐가 달라 장사하는데 어려움이 이었다.
때문에 여러 나라의 화폐는 하나의 동종화폐로 바뀌어주는 모든 상인들이 신임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게 됐다. 그건 바로 환전은행이다 이는 현대은행 시스템의 전신이다 환전과 저축 그리고 은행은 신뢰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외국자금의 대량 유입과 국내 금융시장의 빠른 발전은 암스테르담을 세계최초의 금융중심지로 만들었다. 이와 더불어 나타난 금융버블의 후유증 역시 가장 먼저 맛 보야했다.
1630년대 튤립의 가격은 황소 4마리 가격에 맞먹어 꽃으로써의 가격을 크게 넘어섰다. 이때 튤립은 관상용이 아닌 희귀한 투자 상품으로써 변해 버렸고 재산증식에 광기로 가득 찬 사람들은 집 보석등을 팔아 튤립을 사기에 이르렀다. 1637년 튤립의 가격이 붕괴되면서 일부 튤립가격은 1/1000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 기간에 수많은 은행들 까지 도산하게 된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금융대란이었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금융버블은 현대 금융시스템의 하나로 남아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 벽에 의지해 인디언들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영국인들의 해상공격까지는 당해 낼 수 없었다 1652년 영국 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결과는 네덜란드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1644년 영국인들의 맨해튼 정복 후 뉴 암스테르담을 뉴요크로 명칭 지금의 뉴욕이다. 이때 벽이 철거되고 도시를 관통하는 거리가 형성됨으로 월스트리트로 불리게 된다.
네덜란드가 북미 식민지를 영국에게 빼앗긴 후 영국 본토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암스테르담을 대신해서 새로운 국제무역 및 금융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명예혁명은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이때부터 영국의 왕실은 조세의 부과를 마음대로 할 수없고 법률의 집행을 임의로 할 수없고 의원선거에 간섭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영국 은행 역사학자는' 명예혁명으로 인한 진정한 변화는 금융 결정권의 이양이다. 국왕의 통제에서 의회와 국민에게 넘어간 거다.'라고 말한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 정부의 재정은 왕실재정으로부터 분리됐고 영국정부가 발행한 채권은 영국의 국채로 바뀌면서 왕실의 채무로 남지 않게 됐다 의회가 보증을 서자 영국의 국채는 신용도가 크게 높아지게 된다.
1694년 잉글랜드 은행 설립 후 국채 발행 하여 런던 금융시장의 발전을 가져왔다 대량의 증권들이 쏟아져 나오게 했다. 영국은 해외확장을 위해서 충분한 군비를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어지는 200년 동안 영국인들은 대외 전쟁을 멈춘 적이 없으며 이 전쟁은 모두 영토확장을 위한 식민전쟁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금융의 융성하던 시기에 세계 금융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가문이 나타나게 된다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본사가 런던에 들어선 것이다.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로스차일드가가 보유하고 있다 이로써 세계최대의 다국적 은행을 보유하게 된다. 그들은 유럽은행들과 손잡고 19세기 중반까지 모든 국제금융 시장을 지배한다 로스차일드가문이 운영하는 다국적은행의 번성은 영국 금융시장의 급속한 발전과 글로벌 무역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을 끊임없이 증강시켜 주는 결과를 낳았다.
19세기 중반에는 당시 국제 무역의 40%가 파운드화로 결제되고 영국의 해외 투자는 서방 열강들의 대외 총투자액에 절반 이상을 점유했다. 바로 이 시기에 영국 의회는 중앙은행의 기능을 잉글랜드 은행에 부여했고 잉글랜드 은행은 세계최초의 현대적 의미로 중앙은행이 된다.
국채발행의 변화와 다국적 은행의 출현 중앙은행의 탄생으로 영국인들의 명예혁명의 시작된 150년 만에 결국 현대금융을 새로운 위치에 올려놓아서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월스트리트의 융성은 바로 국채 발행으로부터 시작된다. 1783년 미국은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영국의 통치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금융시스템에 있어서는 영국의 금융시스템을 복제하다시피 한다.
1803년 영국인 투자자가 소유한 미국 주식은 미국의 총시가의 3천200만 달러에 반 정도였다 100년의 발전을 걸쳐 새롭게 일어선 미국이 영국을 대신해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면서 뉴욕은 런던을 대신해 새로운 금융의 중심지로 떠올랐으며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도 런던의 로스차일드 가문을 능가하는 새로운 금융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뉴욕에는 뉴욕인이 없다 누군가 말했듯이 그곳은 하나의 세계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이 암스테르담에서 가져온 주식제도 주식거래소 그리고 환전은행으로부터 영국의 이민자들이 런던에서 가져온 국채 다국적은행과 중앙은행의 현대금융의 씨앗들은 결국 뉴욕을 자본의 도시로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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