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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타리/경제의 다양한 이야기

월스트리트 3부, 두갈래 길

by thanks tree 20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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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대 금융사학 교수 리처드 실리는  '2008년 금융위기는 월스트리트가 자초한 위기라고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습니다

의회나 규제당국도 그 위기에 개입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의회도 정부를 압박해 빈민들이 집을 사도록 도왔을 것입니다.'말한다

 

짐 로저스 투자자는 '투자자들이 모두 성공한다면 시스템이 제대로 돌지 않습니다 시장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성공하면 나머지는 실패해야 합니다 그게 삶의 이치니까요.' 말한다

 

리드 인터내셔널 그룹 회장 앨런 발데즈는 '사람들은 월스트리트에 충분히 당했기 때문에 변화를 원합니다' 말한다.

 

월스트리트는 정부와 거리는 두는데 익숙해진 듯하다 그러나 거리 하나를 두고 양쪽이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적이 있었다.

 1789년 4월 30일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위싱턴은 뉴욕 증권거래소 옆에 있는 패더럴홀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건국 당시부터 재정난에 시달린다 독립전쟁기간 동안 연방정부와 각 주정부는 총 5천4백만 달러  채무를 남겼다.

 

 위싱턴은 부관인 해밀턴에게 해결책을 의뢰한다 해밀턴은 빈민가 출신에 사생아였다. 그는 상점에서 일다 그곳에서 무역과 장사를 배우게 된다  대다수의 개국공신들이 농장주라 장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농장주 출신의 개국공신들은 화폐 발행량을 늘리고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해밀턴은 통화팽창으로 가치가 하락한 화폐로 채무를 상환한다면 국가의 신용도의 하락과 더 이상 돈도 빌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2살의 젊은 재무장관 해밀턴은 상환할 돈이 없다면 채무를 남겨두어야 하겠지만 신용을 잃지 않으려면 당당하게 남겨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금융사 박물관에 해밀턴이 24살 했던 말이 남아있다. '1781년 과도하지 않은 채무라면 그건 국가적 축복이라 할 수 있다.' 해밀턴의 계획은 당시 재무부에 남은 것이라곤 아무 가치 없는 화폐와 각종 독립전쟁 채권 그리고 차용증서들 뿐이었기 때문에 우선 재부부가 신화폐를 발행해 구 화폐를 가진 사람들에게 1:1 비율로 환전해 주고  구화폐는 시장에서 퇴출되고 신용이 양호한 신화폐가 이를 대체하게 되며 정부가 다시 신채권을 발행해 신화폐로만 구매하도록 하면 신화폐는 다시 재무부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결국 재무부는 전쟁 중 발생한 모든 채권과 차용증서를 새 돈으로 매입해서 구 장부를 모두 정리하고 정부는 구 채권을 신채권으로 대체하면서 국가의 신용을 유지하면 되는 것이다 훗날 사람들은 이 계획을 회전문 프로젝트라 불렀다. 월스트리트는 마침 정부와의 합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지닌 월스트리트 중개인들은 회전문 프로젝트가 국회에서도 통과되기도 전에 소리 소문 없이 각 주의 구화폐를 액면가 1/10 수준으로 매입하기 시작됐다. 월스트리트는 최대한 해밀턴 계획에 협조했다. 그래야만 중개인들이 저가로 축적한 구화폐들로 폭리를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냉혹한 세상에서 성장한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파악했다 인간의 이기적인 천성은 쉽게 고칠 수 없지만 지혜로운 입법자가 길은 인도한다면 대중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해밀턴의 회전문 프로젝트는 의회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반대세력에 중심은 토마스 재퍼슨이었다.

 

 해밀턴 집안의 배경과 현저한 차이가 있다 수백 명의 노예와 수천 평방미터의 버지니아주 담배 농장을 상속받았다 젊은 나이에 전국 최고 부자 중 하나였다. 1776년 초 여름 독립선언문의 주요 기초인 중 한 명인 재퍼슨은 필라델피아 여관에 온다 이곳에서 독립선언문 초고가 완성된다 그 내용은 이렇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기에 양보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중에는 생존권 자유권 행복추구권이 있다."

 

 제퍼슨은 해밀턴 계획에 반대했다 세부조항에는 주 정부는 채무를 상환할 필요가 없고 연방정부가 일괄적으로 부담한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에는 공짜란 없듯이 권력과 의무는 언제나 대등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미국의 건국자들은 자신들이 수립한 이 나라를 조심스럽게 방어해 왔고 중앙정부의 권력에 대해 신뢰가 아닌 통제를 해왔다 이를 위해 종전에 연방정부를 해산시키고 자산들은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반대파들은 현실의 곤경을 탈피하기 위해 회전문 프로젝트가 위험한 황금 올가미라고 선포했다. 재퍼슨과 해밀턴의 대립으로 회전문 프로젝트가 보류됨으로 미국에는 양대 당파가 존립하게 된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민주당과 공화당이 바로 이 두 사람의 의견차이로 인해 탄생된 것이다.

 

 정부 권력의 시장 진입에 관한 논란 역시 발단은 여기 있었으며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연방정부의 권력이 처음부터 막강했던 것은 아니다 연방 정부는 질서와 혼란이 없는 허수아비와도 같았다. 미국 금융사학자는 '해밀턴은 현실론자이기 때문에 진실한 세상에서 일하고자 했지만 재퍼슨은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론 인간의 본성이 그렇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1787년 해밀턴은 제원회의 주요 관리인 중 한 명으로 참석한다 이 헌법은 취약했던  연방정부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연방주의자 논고의 한 구절이다." 인류가 모두 천사라면 그 어떤 정부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천사들이 통치를 한다면 정부에 그 어떤 외적 내적 통제도 가해지질 않을 것이다 " 이는 인생의 약점에서 출발해 정부에 존재하는 합리성과 권력의 관계를 논증하는 말이다.

 

해밀턴은 바로 이 책의 작가 중에 한 명이다 제헌회의가 열리는 순간 토마스 재퍼슨은 프랑스 공사로 파견 중이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을 직접 목격하고는  유럽의 혁명과 유혈사태가 산업혁명으로 인한 이익충돌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풍족한 토지가 인간의 불안한 욕망을 안정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미국인들이 산업화를 쫒지 말고 자급자족하면서 평온한 삶을 누리리를 희망했다.

 

 재퍼슨은 이상향을 젊은 농장주들로 구성된 국가이다 자신의 땅에서 일하는 젊은 자영농들 말이다 해밀턴은 미국이 강대해지려면 제조국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산업혁명을 기대 기업가와 공장에 자금을 지원할 금융시스템을 원했다

반면에 재퍼슨은 돈에 대한 개념이 없어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부를 창조하는지 몰랐지만 해밀턴은 알았다.

 

 1790년 6월 20일 미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대담자리에 동석하게 된다. 한 달 후 해밀턴의 회전문 프로젝트는 국회를 통과하고 연방정부가 뉴욕을 떠나면서 월스트리트와 위싱턴 정부는 각자의 길을 걸게 된다. 정부의 권력과 금융세력 간의 정쟁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현재 뉴욕타임스 광장을 지나다 보면 대형 전광판을 하나 볼 수 있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미국의 부채 총액이다 2008년 미국의 국가부채는 10조 달러 시대로 진입했다. 국가 부채증가에 더불어 세계경제대국의 정상위치에 올랐다. 해밀턴은 국가부채를 축복으로 바뀌어 놓았다 그가 국채를 새로운 금융상품으로 변모시켜 월스트리트에 내놓자 증개인 들은 국채 가격의 상승을 부채질했다.

 

 1794년 미국의 국채가 유럽에서 최고의 신용등급을 획득하자 이때부터 바다를 건너 유럽의 자금이 이 신생국가에 유입되기 시작한다 해밀턴의 아이디어는 미국과 월스트리트를 도약시키는 계기가 됐다.  월스트리트는 더 많은 기회를 갈망하지만 위기는 언제나 더 많은 자유를 읽게 만든다.

 

 오바마 정부의 일련의 개혁들 (금융개혁 법안에 서명) 연방 준비은행을 전례가 없는 권한을 가진 가장 강력한 중앙은행으로 변모시켰다. 금융사학교수 찰스 가이스트는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으로서 금융 감독까지는 아니지만 초소한 중앙기구 자격으로 은행을 감시할 수 있었다"말한다

 

 1842년 영국의 작가 디킨스는 영국행을 앞두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잠자리 들기 전에 창문 밖을 바라보니 길 건너편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이 마치 슬픔 유령 같은 모습을 들러낸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서 그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공기조차 사늘했다."  디킨슨이 본 것은 바로 해밀턴과 재퍼슨의 싸움으로 문을 닫은 미국 중앙은행이었다.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시장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권력의 공백을 틈타 월스트리트의 사설기관들이 미국에 금권을 장악하게 된다 중앙은행 없는 미국은 통제력 없는 열차처럼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음에도 서방 국가 중 가장 자유롭지만 가장 불안한 경제체제가 되고 말았다.

 

 도덕성만으로는 월스트리트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월스트리트는 눈만 감으면 코를 베어가는 곳이다. 1972년 금융위기는 재퍼슨이 해밀턴 정책에 의문점을 가지게 만들었다 반면에 해밀턴은 이렇게 주장했다." 누구나 금융위기를 원치 않지만 경제가 현대화되는 과정 속에서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해밀턴은 월스트리트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는 투자자들과 파렴치한 투기꾼들과는 분명한 선이 존재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재퍼슨은 월스트리트는 인간본성의 타락성이 모여드는 하수라고 표현했다. 1972년 위기가 두 달 만에 진정된 후에 21명 중개인들과 세 곳의 중개회사가 월스트리트 버튼우드 나무아래서 협정을 맺는다.

 

 중개인들 간에 거래수수료율을 정하고 거래원칙에 대해 엄숙히 선서한 것이다 이후 월스트리트 중개인들은 자율 규제협회인 중권업협회를 설립해 또 다른 금융위기에 대처하고 정부에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때부터 월스트리트는 1세기 동안 정부의 시야에 벗어나 자율적인 성장을 한다.

 

 1900년 미국의 국민 총생산량을 영국을 초월해 경제 총량에서 세계 최대인 국가가 됐다. 그해 미국의 증권 총액은 600억 달러로 국민 총생산액에 3.2배에 달했다. J.P모건을 필두로 한 부호들은 월스트리트에 운집했고 록펠러 카네기 가문이 실질적으로 이 나라 금권을 장악한다.

 

 J.P모건은 자신의 사단이 나라의 자본 시장을 성실하고 믿음직하게 관리한다고 믿었다 20세기초 누가 이 모든 역량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모건전기> 작가 "당시 정부는 그 부분까지 담당할 수 없었다 모건이 살아있는 동안 미국에는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중앙은행의 책임자를 자처한 것이다."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월스트리트를 정부의 통제하에 두려 했지만 그곳은 이미 자유시장에 익숙해져 있고 스스로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19세기말부터 미국에는 그전에 볼 수 없었던 전경들이 나타났지만 1903년 미국인들은 노후와 질병 그리고 실업등의 문제를 우려하기 시작한다.

 

 1907년  증시가 폭락하자 사람들은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고 한 신탁회사의 총재가 자살하면서 도산과 공황이 시작된다. 이 당시 미국의 재무부 장관이 모건 도서관으로 달여오자 모건은 당장 2천500백만 달러를 풀어 유동성을 증가시키면서 예금주들이 은행에서 돈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면서 공황도 타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가 1907년에 금융위기에 대처한 조치는 오늘날 미국 금융시스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자신의 국가에 그렇게 큰 힘을 지닌 사설은행가가 있다는 데에 두려움을 느낀다. 1913년 J.P모건이 죽은 후 9개월 뒤에 미국의회는 연방준비제도 설립을 비준한다. 미국에 중앙은행이 탄생한 것이다.

 

그 후 100년 동안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통화정책을 관장하면서 경제권의 점진적인 이전을 수행한다 이는 미국 정부가 경제권을 부여받고  강력한 규제 당국으로 등극한 것으로 이 결과 월스트리트의 우려와 비난이 끊이지 않게 된다. 1804년 재퍼슨은 미국의 3대 대통령이 됐다 해밀턴은 미국 정계에서 자취를 감춘다.

 

 해밀턴의 이상은 월스트리트에서 현실로 구현됐다. 2008년 이후 워싱턴 정부와 월스트리트는 서로 경제를 요하는 동반자처럼 위기에 하루하루를 함께 보내며 나아갈 길을 조심스럽게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