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의회 수상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현대에서 권력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쥐고 있다 그들은 세계의 채권시장을 좌우하는 이들이다. 빌 그로스는 세계최대 채권 자산운용사 핌코의 회장이다 이 회사는 7조 달러나 되는 자산을 운영하고 있다. 그를 채권시장의 황재 미스터 본드라 부른다.
채권은 금융거래 시장과 정치권을 연결시켜 주는 연결고리이다 정부는 징수한 세금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할 때가 많다 그럴 경우 채권을 팔아서 그 차액을 메운다 금융의 역사에서 채권시장의 탄생은 은행의 대부 다음으로 큰 혁명이다. 정부가 돈을 빌릴 수 있는 새로운 창고가 생긴 것이다.
600년 전 이탈리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채권시장은 전쟁 자금을 지원하게 된다 채권시장은 워털루 전투의 승패를 결정했고 세계적인 금융가문을 탄생시켰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미국 남부가 패한 원인이기도 했다. 오늘날 세계는 정부나 회사는 채권을 담보로 엄청난 돈을 빌리고 있다. 약 850조 달러의 채권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채권시장이 포화상태가 되면 자산가치가 높은 부동산 집값은 하락한다.
2007년 여름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위기 이런 혼란 속에서 미국의 국공채는 투자자들의 안전한 은신처가 됐다. 그리스의 철학자는'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다' 전쟁은 낳은 것도 채권이다 전쟁의 원인을 인간의 탐욕과 돈이었다. 채권시장을 통해 전쟁자금을 지원하는 방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발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르네상스 시절 도시국가들은 주변국의 영토와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서 콘도토에리, 용병 징집인을 고용했다. 1360년과 1370년대 활동했던 콘도티에리 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타고난 전쟁광이었다. 존 호크 우드경, 이탈리아어로 조바니 아퀴도로 불렸다. 용병이었기에 돈 만 받으면 누굴 위해서든 싸웠다. 밀라노 피사도 도시국가들은 물론 교황까지도 그를 고용했다.
피렌체의 공문서 보관소 자료에 따르면 14세기초에 5만 플로린화 시의 부채가 1427년에는 500만 플로린화로 늘었다. 즉 부채가 산처럼 쌓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부채를 어떻게 충당했을까 답은 피렌체 시민들에게 있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대신에 시민들에게 돈을 빌렸던 것이다.
물론 의무적으로 시민들은 이런 강제성을 수반한 대가로 이자를 받았다. 장부에 적힌 이 목록이 정부의 채권이다. 당시 정부 채권은 유동 자산으로 급전이 필요하다면 팔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채권은 도시국가의 파산을 막았고 시민들은 이자를 받아서 모두에게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이 멋진 발상에도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부채가 늘자 더 많은 채권을 발행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채권의 가치는 떨어졌다. 16세기 베네치아에서는 군인들이 폭동을 여러 번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그 일로 채권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전쟁 중에 채권을 사려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정부가 원금이나 이자를 지급 못 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지만 채권을 액면가에 따라 이자를 지급되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액면가의 10%만 지급하더라도 이자를 50%까지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채권시장의 원리이다
위험을 감수할 용기만 있다면 원금을 회수할 수도 있고 또한 금융시장의 전체 이자율을 결정하는 것 역시 채권시장이다.
워털루 전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로스차일드가의 네이선은 자신이 전쟁과 평화의 중재자라고 말했다. 또한 국가의 신용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고도 했다.
1810년부터 1836년 사이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들은 국제거물로 급부상한다. 영국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으킨 것은 셋째 아들 네이선이다. 그는 누가 보지 못하게 항상 주덴 도이치 편지를 썼다.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형제들에게 직업정신을 심어 주려고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열정과 타고난 경제적 감각을 바탕으로 네이선은 게토의 무명인에서 런던 채권시장의 황제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금융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역시 전쟁을 통해서였다. 워털루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갈등이 절정에 이른 결과로 두 나라 금융제도에 우열을 가르는 전투였다. 전쟁자금을 약탈에 의존했던 프랑스와 채권에 의존했던 영국에 금융싸움이었다.
로스차일드가 백만장자가 된 것은 워털루 전투의 승패가 채권가격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정부는 채권 판매로 엄청난 현금을 보유했다 하지만 월링턴 공장에게는 채권이 필요 없었다. 군인들에게 급료를 주고 동맹군들에게 사례금을 줄려면 언제 어디서나 지불가능한 통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 네이선 차일드가 사람들은 채권으로 빌린 돈을 금으로 바꿔 윌링턴 공작에게 전달 이를 계기로 전쟁 당사국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운명이 바뀌었다.
이는 네이선 차일드가의 유럽 전체에 퍼져있던 신용인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쟁 중에 많은 금을 운반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고액에 수수료를 받을 수 있기에 가능했다. 로스차일드는 가족중심의 네트워크를 이동해 전쟁자금을 지원했다. 셋째 아들은 런던에 장남은 프랑크푸르트에 막내는 파리에 둘째는 유럽을 오가며 작전을 도왔다.
예를 들어 파리에 금값이 높을 때는 막내가 금을 판다 그다음에는 런던의 네이선이 사는 방식이다. 이것은 금융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충분히 활용했던 것이다
1815년 어느 날 런던신문은 네이선이 대량으로 공채를 매입보도 영국 정부에 채권을 사들였다는 뜻이다. 이는 영국의 워털루 전쟁의 승리로 영국 채권에 가격이 치솟을 거라고 승부를 띄운 것이다. 채권의 가격이 계속 오르자 계속해서 네이선은 채권을 사들였다. 1817년 어느 날 채권가격이 40% 이상 상승하자 되팔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남긴 시세차익은 6억 파운드이다 돈이 곧 권력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메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아들들에게 사랑받기보다는 사람들이 너희들을 두려워하게 만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실제로 19세기 중반 로스차일드가가 지배하던 당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은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반 유대주의의 편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로스차일드가를 증오하는 이유는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막기도 하는 양면성 때문이기도 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필요했다. 전쟁을 통해서 부를 창출했기에 전쟁이 없었다면 19세기 국가들은 채권을 발행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미국 남북전쟁에도 영향을 주었다.
1863년 남북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북군에 포위된 채 끈질기게 저항하던 남군은 결국 항복하고 만다. 패전의 진짜이유는 재정문제였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남부에 주력 수출품인 목화의 판로였기 때문에 손실이 아주 켰다. 이는 목화의 무역을 주도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하자 남부의 운명은 달라졌다. 목화는 채권시장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500백 년 전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처럼 남부 연합은 시민들에게 채권을 팔아 전쟁 비용을 충당하고자 했다. 남부는 목화를 채권 지급담보물로 내놓았다. 이자를 지급하지 못할 경우 목화로 지급하겠다고 투자자들은 안심시켰다. 목화담보채권은 남부에 새로운 전략적 토대가 됐다.
목화의 공급을 제한할 경우 목화와 채권의 가격이 동반 상승하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에서 수입하는 목화의 80%는 남부에서 수출하는 것이었다. 목화의 중요성으로 당시 남부는 영국으로 향하는 목화를 모두 금지했다. 영국은 자산들에 편으로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결국 목화 값이 치솟았고 남부의 목화담보채권 값도 올랐다. 결국 1862년 영국의 모든 방직공장 시설이 가동을 멈추었다.
공장 노동자 중 절반 가량해고 지역 1/4이 빈민구제를 받았다 그들은 이 사태를 두고 '목화기근'이라 불렀지만 인위적인 기근이었던 것이다 결국 남부에 주요 항구가 북군에 손에 들어가고 남부연합이 목화공급을 중단하자 1863년 영국의 방직공장들은 중국, 이집트, 인도 지역에서 새로운 목화 공급원을 찾았다.
그러자 목화담보채권에 투자자들에 신뢰와 남부경제가 동시에 붕괴되었다. 국내 채권시장이 붕괴되자 전쟁비용을 지급해야 했던 남부연합은 '그레이백'을 마구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부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1865년 1월에는 물건가격이 기존가격에서 90배까지 올랐다.
오늘날의 채권시장은 전 세계의 주식시장을 합한 것보다 그 규모가 크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기도 한다 채권시장의 황재 빌그로스의 채권거래는 금융시장과 정부를 비롯해서 연금기금과 주택담보대출 이자율에도 영향을 준다 그럼에도 인플레이션을 두려워한다 인플레이션이 위협적인 이유는 채권의 고정가치 이율을 떨어뜨리기 대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초기에 채권가격이 하락한다 어떤 경우에 폭락을 지속하기도 한다.
예로 아르헨티나나 경제는 1746년 2월부터 악화되기 시작 이 시기 대통령은 후안 페론 1912년 헤로즈 백화점은 아르헨티아나의 화려한 과거를 말해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금융위기가 반복되면 망할 수 있다. 하지만 1989년의 위기 금융파국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 단계는 징수한 세금보다 정부의 지출이 과다한 경우다. 전쟁이 원인 경우가 많다. 1970년대 내전과 1982년 영국과 포크랜드 전쟁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1989년 2월이 되자 물가가 10% 이상 상승 한 달 만에 정부는 은행을 폐쇄 이자를 낮추는 등 환율폭락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한 달 만에 달러 가치에 비해서 140% 하락 세계은행은 대출 동결 세계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게 되자 공채를 발행해 적자를 메꾸려 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으로 휴지조각될 채권을 살 생각이 없었다.
상점의 진열장에는 물건이 텅 비었지만 가게 주민들은 새 물건을 살 돈이 없었다 중앙은행이 외환보유고 잔고가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국공채의 가격이 폭락했다. 이에 중앙은행은 화폐를 더 많이 발해하기 이른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화폐를 더 찍어낼수록 화폐의 가치는 하락해 정부는 더 액면가 높은 화폐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1989년 5월에 한 식당에서 음식 값으로 만 아우스트랄 냈다면 6월에는 이만 아우스트랄 그다음 달에는 육만 아우스트랄 지불해야 저녁 한 끼를 먹을 수 있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약탈이 행해졌다.
하이퍼인플레이션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본 사람들은 일당을 현금으로 받는 근로자들이었다. 매달 고정급여를 받는 공무원들도 피해를 받았다. 그리고 연금수령자들 투자금의 이자 수령액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채권소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채권의 시장은 다시 부활했다 이는 채권투자자의 수가 증가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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